불을 밝혀라
야간에 자동차 전조등이나 후미등을 켜지 않은 차량을 일명 ‘스텔스 차량’이라고 합니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스텔스 전투기처럼 다른 운전자가 차량을 식별할 수 없어 추돌하는 등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스텔스 차량의 대표적인 원인은 자동차 계기판에 불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전조등이 켜져 있다고 착각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저도 실수로 전조등이 아닌 미등만 켜놓고 운전할 때도 있었고, 전조등이 나간 줄 모르고 운전하다가 남이 알려줘서 수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등을 켜지 않던, 켰다고 착각을 하던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소한 것 하나가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성령 충만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세상의 빛이 된 줄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빛을 상실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총회장 목사님께서 모든 사고의 원인은 ‘점검부재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자동차의 라이트가 제대로 들어오는지 점검해야 사고가 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늘 점검해야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불이 밝지 않으면 발을 헛디뎌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기름이 떨어진지 몰랐던 다섯 처녀꼴이 날 수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늘 말씀을 상고할 때 성령 충만을 잃지 않으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자녀로서 삶을 살게 됩니다. 신앙생활, 점검이 필수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5).
이은성
명경지수(明鏡止水)
일본 궁도(弓道)의 명인으로 전해지는 아와 겐조(阿波硏造)는 제자들에게 활쏘기 기술이나 방법을 가르치는 데에는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활쏘기에 관해 제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라고는 그저 “잘 익은 과일이 가지에서 떨어지듯 활이 네 손에서 떨어질 때까지 시위를 당기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겐조는 제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보다 더 중요한 정신적 능력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활을 과녁에 명중시키겠다는 생각을 버리기를, 결과에 관한 생각조차도 버리기를 바랐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궁수가 활을 자연스럽게 쏘길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만의 전략이나 인위적이고 계산적인 요령에 의존한다. 궁극적으로 봤을 때 그러한 요령은 화살을 어디로도 이끌지 못한다.”
이 책은 마침 여러 문제와 결정할 사항들에 둘러싸여 복잡하게 생각이 얽힌 나에게 뭔가 확 와 닿았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했다. “너의 경험, 인간적인 의지와 결과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내려놓아라. 고요함과 평안함 가운데 너의 모든 행사를 내게 맡겨라. 그리하면 내가 자연스럽게 너를 이끌 것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 맑은 거울과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한 마음 상태를 뜻한다. 중국 춘추시대에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대가인 공자의 제자들만큼이나 많았다. 이를 보고 공자 제자인 상계는 불만 섞인 투로 물었다. “스승님, 많은 사람이 왕태를 따르는 까닭은 무엇이옵니까?” 그러자 공자 왈, “그것은 그의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흔들리는 수면으로 거울을 삼는 일이 없고, 그쳐 있는 물로 거울을 삼는데, 왕태의 마음은 그쳐 있는 물처럼 고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거울삼아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명사수가 되려면 잡다한 생각을 비워야 하듯, 명경지수가 되려면 하나님 앞에 나의 잡다한 의지와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풍랑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그때 비로소 그분이 일하신다.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시46:10).
신혁주 전도사
길은 있다
코로나 초기에 학생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감동 프로젝트’를 실행했었다. 바로 모든 교사들이 토요일이 되면 담당 지역을 나눠 중고등부 전체 학생을 1:1로 심방 가는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시간까지 서울과 경기 전역을 돌아다니니 피곤할 법도 했지만 심방을 가는 교사나 학생 모두에게 주님 주시는 기쁨이 넘쳤다.
다시 종교단체의 소규모 모임 금지령이 내려졌다. 목사님은 국가의 지침에 절대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번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고 기도하다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로 온라인으로 새벽기도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보통 교사 새벽기도는 5시이고, 임원 학생들은 6시였다. 그러나 차량을 운행할 필요가 없기에 함께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2주간 온라인 작정 새벽기도를 진행한다고 광고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월요일 첫 온라인 새벽기도를 진행했다. 채팅창을 통해 기도회에 참석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일이 학생들과 교사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반갑게 맞이했다. 각자의 침소에서 기도하고자 일어나는 학생들로 인해 마음이 더욱 뜨거워졌고 감격스러웠다. 갑작스런 시작이었기에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헌신된 교사들로 인해 차차 시스템도 안정되어 갔다. 처음엔 졸기도 하고 어색했지만 점차 깨어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학생들의 피드백도 있었다. 그렇게 2주간의 온라인 기도회가 끝나갈 무렵 교회의 소규모 모임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돌이켜 보니 여러 가지 제약이 있을 때마다 몸부림을 쳤던 것 같다. 물론 부족한 점과 아쉬운 점도 많았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것 뒤에 숨어 안일해지거나 그로 인해 침륜에 빠지지 않았다. 이는 온전히 총회장 목사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본이었고 가르침 때문이었다. 해외집회 때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문제를 디딤돌 삼아 집회를 성공으로 이끄시는 모습을 우리는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길은 있다. 없으면 만들면서 가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침이 된다.
이현승 목사
coollee0817@naver.com
통 큰 자가 됩시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전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실질적인 경영수업을 받았습니다.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경영자로서 어떠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사업상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분별하는 방법, 다양한 거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사람들을 분별할 줄도 알게 되었고,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부모님께서 사업적으로 타의에 의해서 손해를 보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수차례 보았습니다. 그런데 되레 오해와 질타를 받을 때도 있었는데, 그렇다 할지라도 부모님은 단 한 번 변명도, 해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끓어오르는 젊은 피를 가진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잠도 못 자겠고, 일에 집중도 안 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천불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부모님은 “내가 잘못을 했으면 두 발 뻗고 못 자겠지만, 내가 죄를 짓지 않았는데 잠이 오지 않을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신원해주시는데.” 이리 말씀하십니다. 저라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얘기를 막 퍼트리고 다녔을 텐데, 그런 뒷얘길랑 남에게 옮기지도 않으시고, 행여나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까 쉬쉬하며 조용히 숨겨주십니다.
사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래처와의 금전 관계에서 손해를 본 것만 해도 3~4번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너무 분통이 터져 소송이라도 걸어서 가만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불일 듯 들었지만, 부모님께서는 피해를 보더라도 법적 소송은 절대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소송을 거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오히려 삶이 피폐해진다고 말입니다. 손해 본 것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훌훌 털어버리고, 그럴 시간에 기도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라고 하셨고, 차라리 하나라도 더 연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직원들이 그만둘 때에도 원칙대로 하면 그동안 베풀었던 물질적 도움이나 배려를 수치화하여 금전적으로 적용해 회사가 손실을 입지 않도록 해야 함이 틀림없는데, 부모님은 그런 작은 것에 미련 두지 말고 제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더 많이 주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장은 제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남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고 큰마음을 품으면 제게 더 큰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서 말이죠.
총회장 목사님께서는 우리에게 대인배가 되라, 통 큰 자가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작은 그릇들을 담을 수 있는 더 큰 그릇이 되라고 알려주셨지요.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서 이집트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후에 이집트의 총리라는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었어도 그들을 다 품어준 큰 그릇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전쟁에서 이기게 한 영웅이자 생명의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할 때 사울은 이를 시기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세 번이나 살려준 통 큰 자였습니다. 우리 총회장 목사님도 세상으로부터 이단 소리를 들으며 돌을 맞아도, 목사님께 은혜를 입은 많은 자들이 침을 뱉고 배신하여도 허허 웃으시며 그들을 일흔 번에 일곱 번이 넘도록 용서하시는 통 큰 자시지요.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시고 인간을 위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신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이시지 않습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너무 원통하고 분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대라 하셨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 하셨으며,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도 내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통 큰 자가 됩시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을 넓힐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큰 그릇이 되게 하셔서 온 세상을 담을 수 있게 하실 거라 확신합니다.
김온유 집사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한참 코로나19사태로 인해 현장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 때, 미국 괌에서 목회하고 있는 친구와 서로의 안부를 나누다 어쩌면 이 시기가 진짜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는 얘기와 함께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의 주권’에 관하여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문득 ‘선택’에는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나누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사울’을 선택하셨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물론 하나님이 싫다는 짓만 골라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선택받았지만 버림받은 왕 ‘사울’이 되었다.
그 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뒤를 이을 새로운 왕을 찾기 위해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사 그의 아들 여덟 명을 만나게 하셨다. 다윗은 그중의 막내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나답과 삼마는 물론 키 크고 건장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통솔력이 뛰어나 누가 봐도 왕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큰아들 엘리압 마저도 선택하지 않으셨다. 선택받지 못한 다윗의 형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왕으로 선택받기를 기대했을 것인데 선택받지 못해 크게 실망했을까? 아님 부끄럽고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를 선택해주지 않은 하나님이 밉고 화가 났을까? 성경을 묵상해보니 다윗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형들과는 달리 다윗이 왕이 되도록 도왔고 왕이 된 이후에도 훌륭한 장군이 되어 다윗의 곁을 지켜줬다.
인생이라는 길 위를 걷다 보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기도 하지만 선택받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늘 여기 있음은 선택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출생된 것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것도, 학교도, 직장도 모두가 선택이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던 바로 그날 밤, 어쩜 다윗의 형들은 비록 자신들이 왕으로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다윗을 가장 가까이에서 도와줄 수 있는 왕의 형으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때부터 그들은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고로 멋진 왕의 형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싶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내가 선택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망과 부끄러움,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상처가 되어 삶이 힘들게 느껴진다. 하지만 반대로 나에게 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또 다른 역할에 선택받은 은혜와 감사로 삶이 채워지기도 한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하고 버림받으셨지만 그의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각자 주어진 그릇이 다르고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여덟 명의 자녀 중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막내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 해답이 ‘시편 23편’이 아닐까 한다. 아름다운 다윗의 시 안에는 다윗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던 것을 후회하시곤 버리셨다. 하나님은 오로지 감사와 함께 순종하길 우리에게 바라신다.
혹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면서까지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시는 건 아닐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선택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떠나가는 것일 것이다. 그것을 잊지 않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Dr. 권정미
그러려니
스트레스는 대부분 사람으로부터 온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으로부터 온다.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말이나 행동 때문이고, 특히 가족, 직장, 교회와 같은 공동체에서 가까운 사람 사이에 발생한다.
그 갈등을 대화로 풀 수 있다면 참 다행이다. 하지만 끈끈한 정으로 뭉친 가족이 아닌 이상 대부분 대화로 풀기보다 마음속에 스트레스로 남거나 속으로 삭히게 된다. 상대방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확 올라와 차라리 안 보고 살기 위해 그곳을 떠나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쿨한 성격이면 좋으련만, 마음이 태평양 같으면 좋으련만, 나 또한 마음에 잘 담아두는 성격이라 그럴 때마다 참 힘들다.
사람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아니고는 변하지 않는다. 성령의 힘으로도 성격이 변한다기보다 방향이 바뀌는 것 같다. 장점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래서 단순히 나의 지적과 잔소리로 이해가 안 되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 사고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집이 되고, 관계마저 불편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어느 날 아내가 나에게 말한다. ‘그러려니 해보라’고. 못 이기는 척 그렇게 해보니 신기하게도 정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 사람의 자리가 저러니, 상황이 그러니, 성격이 그러니, 그러려니….’ 이게 마음을 좀 내려놓는 건가 싶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 하나님께서도 날 보고 그러려니 하시면 안 되는데….’ 혹여 나로 인해 하나님께서 스트레스를 받으셔서, ‘쟤는 원래 그러니, 꼭 저러니, 도통 깨닫지를 못하니 그러려니’ 하실까 잠시 내 평소 언행을 돌이켜 본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지언정 스트레스는 드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22:11).
박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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