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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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1012호 · 2019-07-21
겨자씨만한 믿음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외모는 유교사회에서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당나라 시기부터 관리채용에 ‘신언서판’이라는 기준을 두었는데, 여기서 신(身)은 단순히 몸 상태가 아니라 용모를 뜻했다.

그러나 요즘 외모지상주의는 지나치게 과하다 싶다. 성경에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이 나온다.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 농부의 딸로 포도원 지기다. 포도원 지기는 포도밭을 돌보는 일로 종일 햇빛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술람미 여인은 얼굴이 검게 타서 볼품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못난이 같은 얼굴을 ‘게달의 장막’ 같다고 표현했다. 그렇게 살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만나게 되고, 솔로몬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솔로몬이 볼품없는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은 결혼까지 하게 되고, 솔로몬의 지극한 사랑으로 인해 술람미 여인의 마음도 회복되어 놀랍도록 변화한다. 술람미 여인의 외모가 바뀐 것도 아니고 검게 된 피부가 어찌된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솔로몬의 사랑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아가1:5).

게달의 장막 같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사랑하신다. 예뻐서도, 똑똑해서도 아니다. 그냥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좀 못 배웠어도, 남들보다 못한 외모라도,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가자. 솔로몬의 사랑을 입은 술람미 여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여,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다.

김성일 집사
신앙논객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라

에릭 리들(Eric Liddel, 1902~1945)은 영국의 100m 육상 선수로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러나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그는 100m 경기의 첫 예선일자가 주일로 발표되자마자, “저는 주일에는 안 뜁니다.”라며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인들의 반응은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신앙심 깊은 척하면서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 등 냉소적인 비난 일색이었다. 에릭 리들은 100m 예선 경기가 열리던 주일날, 한 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며 평소처럼 교회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불참한 100m 경기에서는 영국의 다른 선수가 에릭 리들보다 약간 뒤진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에릭은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수상하고, 400m에도 출전하게 되나 역시 겨우 예선을 통과했다. 마침내 결승전 날,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에릭은 신들린 사람처럼 첫 코너를 돌았고, 경기 내내 선두 자리를 유지하며 월등히 결승선을 통과한다. 그는 결국 세계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고, 이후 400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국가적 영웅이 되었지만, 그는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4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 선교사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교사로 봉사하며 복음을 전했고, 농촌 지역 곳곳을 다니며 전도했으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치료를 위해 헌신한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몇 년간은 한 수용소에서 병든 사람과 어린이들을 도우며 살다가 44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고 얻은 성공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설령 국가적인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믿음을 굳게 지킨 에릭 리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제 곧 수련회가 다가온다. 청소년들이여, 이제 여러분이 에릭 리들처럼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결단할 때다.

신혁주 전도사

생명의 말씀

공평하신 하나님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찬양 가사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이 된다. 뇌성마비라는 불편한 몸에서 나온 절절한 고백 때문일까? 지긋지긋한 가난, 선천적인 육체의 나약함, 극심한 원망과 절망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신앙은 받아들였으나 마음의 원망이 사라지지 않았단다.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 가운데

‘너 원망 그만하고 노트에다가 써 봐라.’ 하시는데 없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 썼단다. 그러고 나니 하나님께서 이번엔 ‘공평하신 하나님’을 쓰라고 하셨단다. 얍복 나루의 야곱처럼 안간힘을 쓰며 그 한 줄을 놓고 씨름했단다.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그 한 줄을 쓰게 되면서 눈물이 터지고 이 찬양이 탄생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건 없지만, 남이 가지지 못한 것들로 채워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거다. 불공평한 하나님에 대한 저항의 신학이 전복되었다.

이는 마치 시편 73편을 보는 듯하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문득 의문이 든다. 이 시편의 저자는 불공평해보이는 하나님의 본질을 탄핵하려 한다. 왜 오히려 악인들은 부유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재앙도 없이 평안하다가, 죽을 때는 고통도 없이 죽는가?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의문들이 다 그렇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잘 믿는 나입니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라고 믿는다면, 그분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에 대해 이런저런 불리한 조건들이 나라고 해당이 안 될 일도 없는 것이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 온갖 고통은 누구에게나 무작위로 적용된다.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은혜를 보는 눈이 부족한 것이다. 결국 시편 기자는 악인들의 종말을 확신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됨을 진정한 복으로 규정한다(시73:28). 어떤 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를 붙들기 원하시는 하나님! 그 ‘관계의 믿음’이 강화되었다면 복이다. 세상의 악에 직면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적응해야 한다.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그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말이다.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한 해와 비의 은혜를 주셔서(마5:45) 불공평해보이지만, 택한 자들을 다루시는 특별한 은혜는 언제나 공평하심을 넘어 복되다!

송직화 목사

부르심의 소망

오직 예수님을 위해

우리 교회는 체육관을 대관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주로 1체육관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가수들의 콘서트 일정이 잡힐 경우, 1체육관을 양보하고 2체육관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방송실은 1체육관 내 사무실에 상주하고 있고, 저는 자막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1체육관에 있는 방송실로 들어갑니다.

일본 모 가수의 콘서트 일정이 있었던 몇 주 전 주일입니다. 방송실에 가기 위해 1체육관 정문으로 들어서려는데, 그 콘서트의 스태프들이 저를 막아섰습니다. 공연 전에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게는 늘 있던 일이고, 사정을 말하면 바로 들여보내줬기에 침착했습니다.

‘안에 교회 방송실이 있고, 저는 거기를 가려고 한다’고 2번이나 말했는데도 ‘절대 안 된다’고 하던 그때, 저를 알아본 안내위원 장로님 두 분이 황급히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스태프들은 공연 당일이라 예민했는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장로님들은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계속해서 사정하셨습니다.

급기야 그 스태프들은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해줘야 하냐’며 장로님들께 짜증을 냈습니다. 그들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분들이신데도 그 젊은 스태프들은 매우 무례했고, 그러나 장로님들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분들이 그들의 무례함을 그저 참는 이유는 단 한가지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예전부터 위쪽 주차장에서 봉사하시는 안내위원님들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체육관을 이용하러 오는 외부인들에게 위쪽 주차장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정을 안내하면 그들은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화를 내며 무례하게 굽니다. 그때마다 안내위원님들은 머리 숙여 양해를 구하고 소리 없이 마음을 다독여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성도들이 불편하지 않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친절하게 안내해줍니다. 한겨울에도,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여름에도, 마스크도 없이 매연을 마셔가며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저 모습일 테지.’ 하며 안내위원님들이 귀하고 멋지게 보여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저를 도와주셨던 장로님들과 안내위원님들을 생각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그동안 지켜봐왔던 그분들의 감사함이 설움으로 한꺼번에 폭발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할 때, 이제까지의 설움들을 기억해주시라고 기도드렸습니다.

누군가 제게 왜 봉사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고민하지 않고 ‘나중에 천국 가서 예수님 만나면 칭찬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 천국에 가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해 줄을 서 있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저는 맨 뒤에 섰습니다. 저 멀리 예수님이 보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다니, 심장이 콩닥콩닥 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저를 발견하시고 반갑게 손을 흔드십니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잘했어!”라고 말씀하시는 상상을 하면, 지친 마음에 이보다 큰 위로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해, 목사님을 도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시는 모든 봉사자들에게 우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박영신 성도

rubyday0@naver.com

주 안에서의 삶

하나님의 장막 시리즈Ⅱ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장막을 에덴동산으로부터 이 땅에 세우시고자 했던 계획이 사단의 속임에 넘어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어그러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세워진 제단에 계속적으로 나타나주십니다. 여러 제단들이 세워졌지만(아라랏 산, 모리아 산, 세겜, 벧엘, 헤브론, 브엘세바 등), 그중에 모리아 산과 벧엘은 특별히 중요한 장소로 구약에는 나타납니다.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그 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고 아들을 주님께 바치려할 때 주님께서 나타나신 곳이며(창22), 벧엘은 야곱이 쌍둥이 형(에서)으로부터 피하여 집을 떠나가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았고(창28), 자손이 창대하여진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납니다(창35:1~15).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쌓은 신실한 사람들에게 나타나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아브라함을 통하여 한 민족(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그 민족이 전 세계에 하나님을 증거함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은 이 땅에 거하시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되어야할 이스라엘의 믿음이 연약하므로 훈련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을 키우셨습니다. 애굽에서 안일하게 살던 그들이 노예로 전락하면서 드디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왕으로부터 구출해주시고,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이요, 왕으로서 인정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 곧 왕과 백성 사이의 법이 된 것입니다.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장막(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 성막은 에덴동산과 비슷한 모형입니다. 성막의 동쪽에 문이 있고 커튼에 그룹천사들이 새겨진 모양(출27:13~16, 25:18~22)은 에덴동산의 동쪽에 입구가 있고 그곳을 그룹천사가 지키는 것과 같으며(창3:24), 성소의 등잔 모양(출25:31~35)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같고(창2:9), 성소의 모든 기물들이 금으로 입혀진 것(출25:11, 17, 31 등)은 에덴동산에 풍성하게 금으로 둘린 것과 같으며

(창2:11~12), 제사장들이 성막을 관리하는 것(민3:7~8)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산을 관리한 것과 유사하고(창2:15), 하나님께서 성막에 거하신 것(레26:12)은 에덴동산에서 거하신 것과 유사합니다(창3:8).

다시 말해, 성막은 하나님께서 땅에 거하시는 장막이 되었습니다. 지성소의 법궤 위에 있는 그룹천사들은 천국 하나님 보좌 주변에 둘러있는 그룹천사들(겔10, 1, 계4)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그 법궤는 천국과 연결되는 하나님의 발판으로 상징되며, 성막 안에 있는 기구들(물두멍, 향단, 등잔, 놋단, 세수대야 등), 떡과 떡상 등은 집에 필요한 물품들과 같아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때는 구름과 불기둥으로 가리시고 나타나시며,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는 그 기둥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막은 또한 우주를 축소한 모습입니다. 성막의 지붕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흰색 베실 등으로 짠 것으로, 이것은 여러 색깔의 하늘을 상징하며, 성막 안의 등잔 불빛은 해, 달, 별들의 빛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 안에 거하시며,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자 함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거하시며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주변의 많은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도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국을 펼쳐 가시고자 하시는 계획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재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하셨는지를 다음 시리즈에서 보겠습니다.

권문선 선교사

빛이 되리라

내 맘속의 자아 이미지

성공학의 대부이자 성공학의 고전 중에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저서 ‘성공의 법칙’을 출판한 맥스웰 몰츠는 ‘자아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성공의 법칙들을 풀어낸다. 다소 어려워 보이지만 쉽게 설명해보면, ‘자아 이미지’란 내 잠재의식 속에 내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형상이나 생각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은 ‘나는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라는 긍정의 자아 이미지를 가진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번에도 잘 안될 거야. 예전에도 잘 안됐으니까. 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어. 질 것 같아.’ 등등의 부정적인 자아 이미지를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자아 이미지는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배경과 환경, 충격적인 쇼크 등에 영향을 받아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으며, 인간은 그 자아 이미지를 바꾸지 않는 한 그 테두리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 해답이 있다. 달리 말하면 성공하고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아 이미지만 바꿔주면 된다. 부정의 이미지, 절망의 이미지, 패배와 포기의 이미지, 상처와 고통의 내적 이미지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파괴하셨다. 그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긍정의 이미지, 기쁨의 이미지, 성공의 이미지, 행복과 평강의 이미지를 스스로 우리 속에 반복해 주입시켜 나의 내적 자아 이미지를 의지적으로 변화시킨다면, 우리도 한계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고 성공의 법칙을 내 삶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망치려고 오늘도 달려드는 악한 마귀와 귀신의 힘을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이겨내고, 우리의 자아 이미지를 지키고 변화시켜 축복의 삶을 영위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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