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더기가 무서우면 장 담그지 말라(눅12:1~12)
목회 초기, 저는 물론 우리 성도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의 일에 전념했습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했고, 전단지와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러다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고, 제사를 안 지낸다고 남편에게 맞기도 했지만, 다음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기쁨으로 교회에 나왔고 계속해서 전도에 매진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우리의 활활 타오르는 신앙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둘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과 유사합니다. 너무 사랑하니까 부모가 반대해도, 세상이 뭐라고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청춘남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우리의 신앙에 이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적당히 해라, 유난 떨지 마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타협하고, 자제하는 모습들이 간간이 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유난을 떨지 않으면 우등생이 될 수 없습니다. 유난을 떨지 않고 어떻게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땁니까? 우리는 도상 위의 주자일진대 우승한 자에게만 주는 면류관을 쓰려면 유난스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유난 떨지 마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전부터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다만 그때는 안 들렸던 것뿐입니다. 열심히 뛰고 달리느라 안 들렸던 것입니다. 요즘 새삼 그들의 말이 들리고, 그들의 시선이 의식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열심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들리고 보이는 것입니다. 기차가 달릴 때 개 짖는 소리는 안 들립니다. 짖고 있지만 안 들리지요. 그러나 멈추면 다 들리듯이 말입니다. ‘그 여자는 이래서 안 돼.’라고 엄마는 예전부터 말했다는 거지요. 사랑이 뜨거울 때는 그것이 안 들렸는데, 사랑이 식고 보니 엄마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엄마 말이 맞네.’ 하고 동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지. 남들처럼만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이미 첫사랑, 초심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불이 꺼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얼마 전에 뉴욕 맨해튼에 대규모 정전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난리가 났지요. 모든 게 정지되어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갇히고, 행여 일어날지 모르는 약탈과 범죄 때문에 뉴욕시에 온통 비상이 걸렸습니다. 인생에 정전사태가 나면 이렇게 됩니다. 도적이 들고 넘어져 다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는 순간, 인생에 정전이 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12:4). 마태복음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고, 사람의 말에 춤추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를 주님은 ‘친구’라 칭하시며(요15:14), 그에게 숨김없이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귀담아들어야할 소리는 그분이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사51:12~13).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잠29:25). 사람들이 비방하는 소리가 두렵다고 내 신앙을 팔아먹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입니다. 구더기는 나중에 떠내면 되는데, 그것 때문에 장을 안 담그면 간을 어찌 맞춥니까? 간이 안 맞는 음식을 어찌 먹는단 말입니까? 사람의 비난과 모함 소리가 두려워서 신앙에 제동을 걸면 천국에 어찌 간답니까? 그들이 나를 구원해줍니까?
축구 선수가 태클이 두렵다면 축구 그만둬야지요. 야구 선수가 외야의 야유소리가 두렵다면 야구 접어야지요. 신앙생활을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말이 두렵고, 눈이 두렵다면 적당히 신앙생활하세요. 기름을 적당히 준비한 다섯 처녀처럼 말입니다. 그 결과는 당신 주변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온전히 당신 것이 될 겁니다. 그때 누굴 원망한다고, 누굴 탓한다고 천국 잔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주변의 핍박과 모함이 두려웠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타협했겠지요. 다니엘은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신상에 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더 잘 되었을까요? 더 지위가 올라갔을까요? No, No! 과정은 평탄했을지 몰라도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왕에게까지 버림받아 원래처럼 포로가 된 노예 신세로 살았을 것입니다. 제가 교단에서 제명되는 게 두려워서 적당히 타협했다면 오늘날의 예수중심교단이 있었을까요? 세계 70여 개국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저는 타협한 몇몇 목사들의 최후를 봤습니다. 목회도 못하고, 비참하게 된 것을 봤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 사람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버리신 까닭입니다.
여러분, 신앙뿐 아니라 무슨 일에든 저항은 있고 장애물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무서워서 무엇엔가 도전하지 못하고, 일을 시작하지 못한다면 어쩌겠습니까? 평생 그 밥에 그 반찬으로 살아야지요. 잠언에 보면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잠14:4)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유가 더러워지는 것이 두려워서 소를 못 키운다면 일일이 곡괭이 들고 사람이 일해야 하니 진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유가 더러워지더라도, 남이 좀 뭐라고 하더라도 소의 힘으로 밭을 갈아 곡식을 많이 거두면 손가락질하던 자가 곡식을 얻으러 올 것 아니겠습니까.
자고로 장애물은 인생의 소금과 같습니다. 소금을 쳐야 인생의 맛이 나듯 장애물이 있어야 잠자는 인생이 깨어나고 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목표를 설정하면 귀는 막고 오직 목표물만 보고 달리세요. 물론 가다가 넘어질 수도, 다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운을 인정하지 않을 때 상대를 KO시킬 수 있고, 일어나 다시 뛸 때 누군가를 앞질러 우승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겁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공에 이르는 과정이요, 실패하지 않는 또 하나의 경험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꾸고 도전하세요. 반드시 승전보를 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 할렐루야!
사랑이 무르익어야
결혼에 골인한다
거센 파도가
유능한 해군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