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요술쟁이의 집에 생쥐와 고양이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고양이만 보면 두려움에 떠는 생쥐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요술쟁이는 생쥐를 고양이 모습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랬더니 고양이로 겉모습이 바뀐 생쥐는 이제는 개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의 모양으로 바꾸어주었더니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을 본 요술쟁이는 겉모습을 아무리 바꾸어주어도 마음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가득 찬 생쥐이니 그냥 생쥐로 살라고 다시 생쥐로 바꾸어주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성경은 그 마음이 믿음이라 하시며,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 그 마음에 있으니 잘 지키라고 권면하신다(잠4:23).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앞에 두고 마음이 두려웠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이 약해져 있는 여호수아를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수1:9).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다. 진정한 힘과 능력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 어린 딸의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아비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막5:36)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그 딸을 살려주셨던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담대히 세상과 맞설 것을 명령하신다. 두려워말자. 불안해하지도 말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승리는 우리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오직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김상욱 목사
ksw9669@hanmail.net
소금 같은 사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은
‘빛과 소금’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맛을 잃은 소금은 쓸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짓밟는다고도 하셨다. 이는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면 맛을 내고, 물고기의 부패를 방지하듯이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꼭 필요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소금이기 때문에 소금처럼 ‘갈증을 유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만났을 때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나 영적 갈증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도록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만약 우리가 복수해야 할 때에 용서하고, 미워해야 할 때에 사랑하며, 비난하면서 불순종할 때 순종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고, 또한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다~!”라고 부러워하며 질문해온다면, 그 사람은 이웃에게 ‘영적 갈증’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소금처럼 이웃에게 영적 갈증을 유발시키는 삶을 살지 못할까? 그 이유는 언제 소금이 맛을 잃게 되는지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먼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그만둘 때다. 반드시 해야 할 일, 즉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세상에서 더 이상 맛을 내는 소금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맛을 내는 소금이 된다.
둘째, 우리가 희생하기를 포기할 때다. 희생은 소금의 모습이다. 소금은 녹아서 부패를 방지하고, 녹아서 맛을 낸다. 그리스도인은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봉사의 자리에서 또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일꾼들에게 돈 대신 소금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소금이라는 ‘salt’가 일꾼들에게 주는 봉급이라는 ‘salary’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맛을 내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14:34).
이정금 전도사
차차와 걸걸
마귀가 세상을 두루 돌아다닌 후에 총회를 했다. 그가 성도들을 어떻게 유혹하여 넘어뜨렸는지 자기 나름대로 사용했던 방법을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마귀의 발표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가 되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을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갑자기 불어 닥친 시련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뒤흔들기에 충분하였다.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두 번째는 풍족하게 주어서 스스로 타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부족할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다가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고, 그것을 즐기기에 바빠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것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내일 하라’는 것. 마귀는 '하지 마라'가 아니라 ‘내일 하라’는 말로 우리를 유혹한다. ‘차차 하면 되지 뭐. 누가 안 한다고 했나? 조금 있다가 할 거야.’ 이른바 ‘차차 병’에 걸리게 한다. 이렇게 ‘차차 병’에 걸린 사람들은 죽은 후에 ‘걸걸’ 하며 후회하지만 ‘때는 늦으리’다. ‘그때 봉사할 걸’, ‘그때 전도할 걸’, ‘그때 헌금할 걸’, ‘그때 잘할 걸’, ‘그때 화해할 걸’…. ‘차차’의 결과는 ‘걸걸’이다. ‘차차’와 ‘걸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땅에서 주어진 혜택에 만족하며 누리는 삶을 살았을 뿐, 앞으로 오는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주변의 연약한 사람을 돕지도 않았다. 그러한 그가 죽어서 지옥에 갔을 때 그가 한 일은 오직 한 가지, ‘그때 잘할 걸’ 하고 ‘걸걸’ 하는 후회뿐이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가 ‘차차’라는 노래를 부르게 만든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에 ‘걸걸’하며 후회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온 가족의 영혼구원은 차차 할 일이 아닌 바로 오늘 할 일이다. ‘아직은 건강하니까 차차 하면 되겠지,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아마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나올 거야, 차차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 결과가 ‘걸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택함 목사
cjcc1004@hanmail.net
이불부터 개세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미 해군 특수부대 사령관이던 맥레이븐 제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불부터 개세요.”
그가 미 해군 특수부대에서 기초훈련을 받을 당시 아침마다 했던 첫 번째 임무는 바로 자신의 침대를 정돈하는 거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얼음장 같은 바다 속에서 해야 했던 야간 수영훈련이라던가 고문과 다를 바 없던 모래사장 달리기, 무수면 훈련 등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고 시시한 임무였지요. 하지만 그는 아침마다 이 사소한 일을 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아주 작은 실천이 인생은 물론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작은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면 큰일 또한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는 말합니다. “매일 아침 침대를 정돈한다면, 그날의 첫 번째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작은 뿌듯함과 다음 과업들을 수행할 용기를 주죠.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낸 어떤 날에는, 집에 돌아오면 정돈된 침대와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한 그 침대를 말입니다. 그 침대는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침대를 정리하는 이 단순한 행위 하나가 때로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고, 하루를 제대로 끝냈다는 만족감을 선사해주죠.”
저는 5년 전에 작은 원룸으로 독립을 했었습니다. 바쁜 날엔 이불에서 튀어나와 그대로 둔 채 출근하곤 했었는데요. 그러면 퇴근 후 현관을 열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첫 광경이 몸만 빠져나와 동굴같이 된 이불이었습니다. 그걸 보면 왠지 더 피곤해지고 의욕도 사라져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퇴근하고 들어오는 저녁의 나를 위해 아침에 제가 한 일은 딱 5분만 시간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밖에 나가기 5분 전에 이불을 개고, 잠옷을 걸어놓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우고, 현관에 놓인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그것만으로 하루를 꽤 괜찮게 시작한 기분이 들었지요. 맥레이븐 제독의 말처럼 작은 뿌듯함을 느끼며 시작하는 하루는 이불 갤 시간도 없이 후다닥 집을 나서는 하루와는 분명 달랐습니다.
지금은 전보다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요. 이제는 매일 10분씩, 밖에 나가기 전에 집을 간단히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깨끗하게 정돈된 집이 저를 맞이해주고,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가 저를 격려해주지요. 이는 제게 굉장히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가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하셨죠. 달라진 하루를 원하시나요? 인생을 바꾸고 싶으신가요? 그럼 일단 이불부터 개어봅시다.
신은혜 성도
dopal0203@naver.com
일본에서 막 전도사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 분을 전도하기 위해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IMF 위기 때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일본에 돈을 벌려고 오셨는데 비자도 없이 가족들과 떨어져 막노동판에서 힘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만나기만 하면 신세를 한탄하며 불평불만을 늘어놓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처음 나온 날, 예배를 마치고 젊은 남자 집사가 상담을 신청해 와서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집사는 일본에 유학을 왔다가 졸업을 하고 일본직장에 근무하는 엘리트였습니다. 일본 영주권도 가지고 있고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인생이 힘들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죽고 싶다.’고 저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새신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 갖추었는데도 행복하지 못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나봅니다.
그래서 그 두 분 앞에서 인생의 행복과 가짜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성공이나 좋은 환경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절대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물질, 명예, 쾌락과 같은 세상의 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만족을 가져다줄 수가 없는 가짜 소망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오직 예수 안에 있습니다.
상화평 목사
sanghwapyung@hanmail.net
이 정도면 되겠지?
우리 교회는 참 뜨겁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사님의 모습을 우리가 잘 본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뜨겁다 못해 유난스럽고, 극성스럽기까지 하지요.
이러다보니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신앙의 차이로 전 가족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꼭 예수중심교회에 나가야 하냐?’는 것이지요.
가족은 전도하기 쉽지 않습니다. 총회장 목사님께서도 어머니를 전도하시기 위해 많은 기도와 노력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가족끼리 신앙의 레벨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 듯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집도 부모님과 자녀들의 신앙에 차이가 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부모님과 토요일마다 기도처에서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는 수요예배나 청년부 예배를 종종 빠지는 자녀들이 눈에 찰 리 없습니다. 그때마다 저와 형제들은 다른 장로님 자녀들, 다른 비슷한 수준의 청년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그래도 이 정도면 열심히 하는 편 아니냐’고 반박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구원은 개체이며 상급도 행위대로 주시는 것인데, 왜 남과 비교하느냐’고 호되게 야단을 치십니다. 사실 이렇게 올바로 가르쳐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분명 저는 제가 비교하는 다른 자녀들, 청년들보다 더 많은 복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님의 말씀대로 더 하나님께 시간을 넉넉히 드린다면 더욱더 복을 넉넉히 받아 누릴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시대 목사님께서 기름을 준비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넉넉히 구원을 받자’는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혼인잔치를 준비하던 열 처녀 중 기름이 부족한 다섯 처녀들도 분명 기름을 준비했으나, 다만 신랑이 오는 시간이 늦어짐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예상과 다르고, 성령께서 일하실 때 악한 마귀도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과의 시간을 넉넉히 예비해야 합니다.
저는 원래 토요일에만 일찍 들어와서 주일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청년부 예배나 수요예배도 몇 시간 전부터 준비하고 꼭 이날을 피해서 약속을 잡고자 노력합니다.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고 기도로서 복 받을 준비를 넉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하기 전에, ‘이렇게까지 준비했나?’ 하고 역으로 악한 마귀의 허를 찌르고 하나님과의 시간을 예비하여 날마다 예배에 넉넉히 승리하시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김대화 성도
realdialog@naver.com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중학생이던 딸이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며 청천벽력 같은 아픔을 털어놨다. “여자애들이 날마다 돈 빼앗고, 남자애들은 화장실 끌고 가서 변기에 머리를 넣고, 가방 빼앗아 달아나고, 계단에서 밀고…, 너무 무서웠어요.” 딸아이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졌고, 꽤나 오랜 시간 깊은 생채기를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이에게 ‘등교하는 시간부터 주님을 불러라.’ 이것뿐이었다. 물론 나도 온종일 주님을 불렀다. 그때부터 딸의 입술에는 주님이 늘 함께했다. 다행히 대대적인 폭력척결이 시작되었고, 불량학생들은 전학을 가거나 징계를 받았다. 나는 ‘자신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어서 불량아들의 표적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딸에게 “내성적이란 조용하고 여성스러운 것이고, 소극적이란 침착하고 조심스럽다는 뜻이야.” 하며 나름대로 아이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려 노력했다.
딸아이는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쉬는 시간에는 학생들이 기피하는 교무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선생님들의 관심 속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상향평준화의 커뮤니케이션을 쌓아갔다. 이 경험을 토대로 후일 거래처를 돌며 사장님들을 상대로 예수를 전하는 거침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무남독녀로 자칫 온실 속 화초로만 키워질 뻔한 딸은 고난이라는 성장통을 앓은 후 부쩍 어른스러워졌고, 어느덧 엄마의 힘이 되어 말씀으로 서로를 바로 잡아주는 사이가 되었다. 또한 늘 딸과 동행했던 주님은 최고의 극상품 ‘생활기록부’를 안겨주셨다. ‘평소 언행이 바르고 심성이 착하고 따뜻하며 인성과 생활태도가 매우 우수하여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무궁한 발전이 기대되는 학생.’
우리는 오늘도 ‘주여~’를 입에 달고, 발랄한 표정으로 찬송을 흥얼거리며 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추성숙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