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으려면 적응하라
지난주에 이어 교육부 담임 이초석 목사님은 JC아카데미에서 다시 열강을 하셨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아남는 자는 IQ
(지능지수)나 EQ(감성지수)가 높은 자가 아니라 AQ(역경지수)가 높은 자입니다.
어느 환경, 어느 조건에든 적응하는 자가 진정 강한 자이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적응력이란 내 관리요, 나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즉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을 보세요. 그는 형의 장자권을 빼앗아 외가로 도망갔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환경은 엄마 품속에 있던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외가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했고, 일한 대가를 열 번이나 착취당했을 때 억울함도 참아야 했고, 아내가 뒤바뀌고 다시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까지 다시 7년이란 세월동안 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적응했습니다. 자기를 다스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랑하는 라헬을 기다리는 7년이 7일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만사 일체유심(一切留心)입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마음먹는 게 ‘적응’입니다. 솔직히 나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신제가(修身齊家) 후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고난이 크면 영광도 큽니다. ‘적응하라’는 말은 곧 고난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나도 목회 초기에 비가 새는 온실 속에서도 살았고, 자동차 속에서도 자봤고, 6개월 동안 라면만 먹은 적도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단이니 가짜니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도 숱하게 들었습니다.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그런 생활이 쉬웠겠습니까? 그러나 됩디다. 나를 다스렸더니 적응이 됩디다. 그래서 오히려 즐기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난만큼 영광이 크다는 것을 요즘 피부로 느낍니다.
골이 깊은 만큼 산이 높더란 말입니다.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면 어찌 되는지 압니까?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고양이처럼 사람에게 아부나 하고, 약삭빠르게 되고, 사람이 주는 죽은 것이나 먹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고양이로 키우지 않았습니다. 호랑이처럼 우직하고 담대하게 키웠습니다. 적응력의 다른 이름은 ‘담대함’입니다. 야곱처럼 ‘비록 지금 내가 새우잠을 자더라도 훗날 거부가 되어 금의환향 하리라’, ‘내가 지금 비정규직이지만 나중에는 이 회사에 임원이 되리라’, ‘내가 지금 방 한 칸에 살지만 저택에서 살리라’는 꿈을 가지면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해지며, 그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적응하라고 하니까 거기에 만족하고 ‘그런대로 지내시구려’ 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즐기다보면 일의 능률이 오르고, 평안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과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불행한 줄 압니까? 그것은 행복의 커트라인을 그어놨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30평대 아파트는 살아야하고, 월 소득 얼마는 되어야하고, 차는 중형차 정도는 타줘야 하고, 자식이 명문대는 다녀줘야 하고…. 이런 커트라인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못 미치면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요즘의 병폐입니다. 그래서 자살하고, 아니면 묻지마 범죄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경험이요, 그것이 적응력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에 목매는 자들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과감히 자존심을 버리고 진군할 때 역경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AQ는 얼마입니까? 온실 속의 화초는 밖에 내다놓으면 바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지금의 고난에 감사하며, 이 기회를 통해 역경지수를 높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목사님이 젊은이들의 지도자로 자처하신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 행함이 없는 지식은 그저 백과사전 속의 남의 지식에 불과하다.
바라건대 우리 젊은이들이 진정 오늘의 말씀을 깨닫기 바란다. 깨닫는 것은 바로 내 것이 되었다는 것이니까.
기자 신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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