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종은 나의 축복의 통로다 (민6:22~27)
저는 혹 누군가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받으면 꼭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도 이처럼 풍성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또 집에서 샤워를 할 때도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다 이렇게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지는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도 우리 성도들이 다 자가용을 타고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설마 매번 그러겠어? 어쩌다 그러겠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정말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저는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간절한 소망이 저를 따르는 무리가 잘 살고,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러데요. “목사님, 예배 끝나고 안수 좀 하지 마세요. 힘드신데 가끔씩 하세요.”라고. 사실 힘듭니다. 진이 빠져 맥을 못 출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우리 성도들을 안수하는 것은, 비록 내가 지쳐 쓰러지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성도들이 제 손길을 통해 병이 낫는다면,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제게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 젖이 헤져서 아파도 아이가 젖을 잘 빨고 튼튼하게 자란다면 엄마는 젖몸살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는 거거든요.
출애굽기에는 제 심정과 동일한 모세의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틈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으로 우상을 만들고 화목제를 드리고 그 앞에서 뛰놀았습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황당했고, 분노하여 증거판을 깨뜨리고 맙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 편에 선 사람들을 빼내어 우상을 숭배한 자들을 도륙하고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32:32). 이게 진짜 목자의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지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목자가 된 자들은 바울의 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목자, 곧 주의 종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을 통해 성도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기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엘리 제사장을 통해 한나의 태의 문이 열렸고,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가 축복을 받았으며, 엘리사를 통해 선지자 생도의 아내가 복을 받았고, 나아만 장군이 나음을 입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주의 종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서울 교회 장로님 중에 한 분은 늘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이 저에게 축복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제가 그 분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 것을 그 분은 믿는 겁니다. 많은 종들이 성도들을 축복함에도 불구하고 그 축복이 임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 줄 압니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이 축복한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겁니다. 저는 제가 축복한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받는 성도가 안 믿으면 못 받는 겁니다.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10:13).
제가 예배 후에 안수를 하면 이 성도가 습관적으로 안수를 받는지, 간절한 마음으로 안수를 받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안수를 하다보면 어떨 땐 제 안에 있는 기(氣)가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님께서 능력이 나감을 아셨듯이 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저를 통해 영·혼·육의 치료를 받았을 겁니다.
주의 종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을 잘 대접하고, 그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의 종 된 입장에서 이런 설교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만 혹여 우리 성도들이 주의 종에게 불손하게 하거나 주의 종의 대접에 소홀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서 하기 힘든 설교를 하는 겁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목사 잘 대접하라고 목사가 설교하네.’ 하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잘못 가르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아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의 종을 잘 섬겨서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사자를 잘 섬겨 자식을 선물로 받았고, 다비다는 베드로를 예수님 섬기듯 했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며 충성하여 복을 누린 자들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그러나 주의 종을 대적하거나 주의 종의 말을 거역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를 술객이나 무당 취급하다가 아들까지 잃었고, 미리암은 모세의 행위에 대항하다가 저주를 받았고(민12), 고라와 그의 일당도 반기를 들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민16). 제사장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은 사울도 그랬습니다(삼상15).
주의 종은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종으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을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10:14).
또한 주의 종은 성도들을 옳은 길로 이끌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러 오는 성도가 있으면 주의 종은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최선을 다해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상담은 실컷 하고는 자기 생각대로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상담이나 하지 말지, 상담은 왜 하는지….
마치 그들은 예레미야에 나오는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같은 교만한 자들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유다 총독인 그다랴를 죽인 갈대아인을 두려워하며 백성을 끌고 애굽으로 내려가려 할 때,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자기들을 인도하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렘42:2~3). 그래서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스라엘 땅에 머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를 갈대아인에 붙여 다 죽게 하려고 한다’며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거역합니다. 누가 예레미야에게 기도해달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그랬습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더니 듣지도 않을뿐더러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이는 주의 종을 기만하는 것뿐 아니라 주의 종을 세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 더 당부드릴 말은 주의 종은 절대 성도들의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의 종이 낮아져 성도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주의 종은 분명히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개는 그렇지 않지만, 간혹 어떤 분들은 주의 종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나름으로 경책하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물론 주의 종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때도 있고, 잘못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를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떠나세요. 하나님이 보시고 징계가 필요하다면 하실 것입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관이니까요.
주의 종의 말을 경히 여기지 말고, 연소하다고 주의 종을 업신여기지도 마세요. 그리고 주의 종은 하나님의 종으로 당신의 축복의 통로임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목사는 사람의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임을 잊지마라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