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같은 복을 받아라 (창22:1~18)
“네 소원이 무엇이냐?” 주님이 제게 물어보시면 저는 지체치 않고 이렇게 답할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 잘 살고, 다 건강하고, 다 행복한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제 소원은 우리 성도들이 잘 되는 것이고, 병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집샀다.’, ‘승진했다.’, ‘합격했다.’, ‘결혼했다.’ 이러면 저는 제가 집 산 것보다, 제 동생들이 승진한 것보다, 제 자식이 대학에 붙고, 결혼한 것보다 더 좋습니다. 진짭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시험 들었다.’, ‘병들었다.’, ‘망했다.’, ‘이혼했다.’ 이러면 제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집니다. 밤에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습니다.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가.’ 싶어 몸살이 납니다.
지난 12월 22일이 제가 목회를 한 지 24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해서 여기저기서 파티도 열어주고 선물도 주고, 감사와 축하메시지도 보냈습니다. 물론 감사하지요. 그런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 줄 압니까? 여러분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해산의 수고로 난 자식들 아닙니까? 부모 생신 날, 선물 사가지고 오는 것도 좋지만, 좋은 소식 들고 온 자식이 제일 효자인 겁니다. 그러니 제발 잘 살고, 제발 건강하고, 제발 행복하십시오. 그 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야 기정사실이고, 이 땅에서도 천국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아브라함 같은 복을 받기 원합니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근원은 원천지를 말합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샘의 근원은 마르지 않듯, 복의 근원지는 세계 경제가 고꾸라져도 절대 마르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 복을 받으라는 겁니다. 아침 이슬 같이 잠시 반짝하는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 구름 없는 아침 햇살 같은 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런 복을 받았을까요? 첫째,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무작정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또한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어보내라고 하셨을 때도 그는 심히 근심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몸종의 몸에서 났다고는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첫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 들려서 광야로 내보내라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의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창21:11). 그러나 그는 결국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들을 내쫓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아들을 각을 떠서 태워 죽이는 것을 할 아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하신 것이 백 번 낫지요. 자기가 대신 죽는 것이 낫지요. 이제 한창 나이인 아들을 어떻게 불태워 죽인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했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근심했다는 구절이 아예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는 근심하던 그가 이삭을 보낼 때는 왜 근심하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너무 엄청난 명령이라 아예 자신을 비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할 수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때론 받들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때론 이해되지 않은 명령이라 할지라도 순종하십시오.
“목사님은 그러셨어요?” 라고 묻고 싶으시죠? 예, 저는 그랬습니다. 본토, 부모, 처자를 떠나라 하셨을 때, 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아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복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둘째, 아브라함 같은 복을 누리려면 십일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출전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돌라오멜이라는 폭군이 소돔 고모라 왕과 일전을 했는데, 소돔 고모라 왕이 참패를 당해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재산이 다 탈취 당했고, 그 때 소돔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그 처자와 함께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조카 롯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브라함이 318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출전해서 야음을 틈타 그돌라오멜 왕과 그 연합군을 격파하고 대승리를 거둡니다. 그래서 빼앗겼던 것을 다 찾아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는 분명히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이 주는 떡과 포도주를 받고 그가 얻은 것 중에 십일조를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멜기세덱은 손을 들어 지극히 높으신 천지의 대 주재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십일조는 신앙의 기본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나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축복해주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제가 우리 손자에게 초콜릿을 열 개 사주고는 “할아버지, 아~” 했을 때, 얼른 제 입에 초콜릿을 넣어주면 그 손자가 더욱 예쁘겠지요? 그거 다 제가 사준 거지만, 예뻐서 나중에 더 많이 사주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안 돼, 이건 내꺼야.’ 하고 뒤로 숨기면 내심 좀 섭섭하지요. 그렇다고 내 손자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저 녀석은 누굴 닮아 저러나.’ 하지 않겠습니까? 십일조가 그런 겁니다. 열 개 주시고, 한 개 ‘아~’ 하시는 겁니다. 더 주시려고 말입니다.
저는 대출받은 돈에서도, 집을 팔고 학교를 팔았을 때도 십일조를 뗐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가족들이 “그건 우리 돈이지.” 했을 때, “무슨 말이냐? 다 하나님 돈이지.” 하며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심어야 옵니다. 심은 대로 나고, 심은 만큼 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주의 종을 잘 대접했습니다. 제가 대접 받으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주의 종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10:41). 아브라함은 주의 종이 왔을 때 그들의 발을 씻기고 떡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아 그들을 잘 대접했으며, 그들이 가는 길까지 전송했습니다. 그들이 대접을 잘 받은 후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기한이 차면 아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을 잘 대접한 결과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10:14). 정말 사도행전 13장에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핍박하는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들을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행정목사를 지교회에 보냈는데, 지교회 목사가 행정목사를 대접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저를 무시한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대접받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복 받으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씀에 순종하고, 십일조 잘 드리고, 주의 종을 잘 섬겨 복의 근원이 되십시오. 제발 잘 되십시오. 공식을 가르쳤는데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이는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잘 되는 길, 부자가 되는 길, 행복한 길을 가르쳐줬는데 그 길을 못간다면 그것은 당신 책임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이 땅에서 잘 되고, 남에게 주며 머리가 되는 복을 누리십시오.
물이 올랐을 때 고기를 잡고
쇠가 달궈졌을 때 두드려라
레일을 이탈한 기차는
전복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