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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사막에도 단비를 내립니다

1366호 · 2026-07-14
깊은 곳에서의 울림

감사는 사막에도 단비를 내립니다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학원 강사였던 그녀는 신입으로 입사한 뒤 몇 년 동안 성실히 일한 덕분에 원장의 신임을 얻었고, 강의는 물론 강사 채용과 관리까지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이 모든 강사를 불러 모았습니다.

“현재 학원 사정이 좋지 않아 다음 달부터 급여를 불가피하게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 동안 생각해 보시고, 이 조건으로 함께할 수 있을지 각자의 뜻을 이야기해 주세요.”

두 명의 강사는 줄어든 급여로는 일할 수 없다며 학원을 떠나겠다고 했고, 그 자매 역시 고민하던 중 제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총회장 목사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자매님, 총회장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지요. ‘흐르는 물 한 컵에도 은혜를 잊지 말라’고요. 자매님이 강의 경험이 없을 때 뽑아 자리를 주셨던 분이니, 저라면 이번 급여 삭감을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일해서 학원을 살리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자매는 결단한 뒤 이전보다 더 성실히 일하며 학원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 버텨냈습니다. 다행히 학원은 1년 뒤 다시 매출을 회복했고, 재계약을 하는 날 원장은 그 자매를 따로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학원이 어려울 때 내 일처럼 걱정해주고 더 열심히 일해줘서 고마워요. 삭감했던 급여는 다시 반영하고, 그보다 더 올려서 드릴게요.”

그녀는 말했습니다. “급여 삭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이 컸어요. ‘내가 이 학원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나에게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싶었지요. 그런데 목사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니, 원망하던 마음이 감사로 바뀌었어요. 강의 경험이 전혀 없던 저를 받아주고 키워준 학원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거든요. 은혜를 깨닫고 감사로 마음이 바뀌자 하나님께서 더 좋은 대우로 갚아주셨어요!”

목사님의 말씀처럼 감사는 ‘기적을 창출하는 통로’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감사와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옥문이 열렸듯이, 감사는 죽음도 피해 가고, 감사는 막힌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범사에 감사하여 만사형통의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김진실 사모

오늘의 메시지

내 마음에 성공이 있다

미국 CNN 방송 등 많은 매스컴들이 운동과 신앙심의 차이점을 보도한 바 있었다. 뉴욕 대학 주변에 있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 후, 곧바로 근처의 헬스클럽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어느 쪽이 더 건강에 좋은 곳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답은 기도하는 쪽이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뉴욕대 연구진들이 수년간 연구 끝에 밝혀낸 결과이다. 교회에 충실히 나가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믿음 없이 운동에 열중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것이다.

철저한 기독교도였던 백범 김구 선생도 젊어서 호구지책으로 관상을 배웠는데, “관상은 신상만 못하고, 신상은 심상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세상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서 승패가 갈린다. 성경 또한 증거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함”이 참 복이라 증거한다(요삼1:2).

총회장 목사님도 사지가 마비되었을 때, 한쪽 눈이 터져서 고통받았을 때, 간이 90% 굳었을 때,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이겨내셨다고 간증하신다. 그러니 믿음을 앞세워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운동도, 사업도, 일상도 살아간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이다(시14:1).

우리, 지혜로운 자가 되어 온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자. 주신 은혜와 복으로 넘치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김상욱 목사

내가 매일 기쁘게

풀무 불 속 넷째 사람

다니엘서 3장에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 일곱 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흔히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 돌아온 기적에 감격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이 사건의 정점은 따로 있습니다. 세 친구를 불 속에 던진 느부갓네살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 외칩니다.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단3:25).

왕이 놀란 것은 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세 친구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감격하다가도, 막상 현실의 어려움이나 곤경을 다시 마주하면 금세 낙심합니다. 다른 성도들의 간증을 들으며

‘왜 내게는 저런 복을 주지 않으실까’ 원망하고 시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그 자체를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지갑에만 시선이 꽂혀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감사는 내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 친구가 불 속에서 자유롭게 거닐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이 비껴갔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의 한복판에 주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감사 포인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주실 무언가에 집착하느라 지금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풀무 불같은 세상 속에, 우리를 결코 혼자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로 온전히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심에 감사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걸어가는 믿음이 허락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8).

전호정 집사

주님을 향한 노래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

신앙(信仰)이란 단어의 한자를 살펴보면 ‘믿을 신(信)’, ‘우러를 앙(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러를 앙(仰)’은 ‘의지하다’, ‘의뢰하다’, ‘머리를 쳐들다’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신앙이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121편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인과 만물을 들어서 우릴 도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먼저 의지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저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쳤고, 눈물까지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분도 할 수 있는 한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순간에 그분은 절 돕지 않았습니다. 아예 전화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목사님의 지혜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끼고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그 일이 있은 지 1년 후쯤, 똑같은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상황을 역전시켜서 일주일 만에 해결해주셨습니다.

역대하 16장에 남유다의 아사 왕은 북이스라엘이 쳐들어올 때, 아람 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은금을 보내고, 아버지들 사이에 있었던 동맹까지 얘기하며 설득하여 결국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견자 하나니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을 책망하십니다. 그래도 아사 왕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핍박하더니, 노년에 발에 중병이 들었을 때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만 찾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역대하 28장에 아하스 왕도 에돔과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강대국인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앗수르 왕은 와서 돕기는커녕 오히려 더 괴롭혔습니다. 성전과 왕궁, 백성들의 재물까지 취해서 앗수르에게 바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이방 신을 찾으며 도움을 구했던 아하스 왕은 결국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 열왕의 묘실에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반면, 그 아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 산헤립이 하나님을 조롱하며 쳐들어온다고 협박할 때, 오직 하나님만 찾으며 기도하고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사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진멸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길은 시편 121편의 기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갔던 순례길과 동일합니다. 강도의 위협, 맹수의 위협, 더위와 추위와 같은 문제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며 가는 황량한 광야 길입니다. 지금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셨습니까? 눈을 들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주님은 절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할렐루야!

이호민 전도사

참된 깨달음

일생을 성령으로!

얼마 전 《예수 혁명》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거친 생각과 흐름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복음의 중심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척 목사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히피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신발도 없이 들어온 더러운 발을 직접 씻겨주었다. 그를 통해 왜 예수님께서 비난을 받으시면서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는지를 깊이 깨닫게 된다. 참된 부흥은 사람의 계획, 프로그램, 웅장한 건물이 아닌,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상처 입은 영혼을 있는 모습 그대로 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부흥된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로니의 모습은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는 뜨거운 사역자였고,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있었으며, 많은 영혼을 인도했다. 그러나 점차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자기 능력으로 착각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눈이 멀어 스스로 주인이 되려 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은혜를 자기 힘으로 이루어 낸 것처럼 여기는 순간,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 또한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내 이름이 앞에 서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 흐려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주님 앞에 솔직히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길을 잃게 된다.

우리에게는 처음 시작했던 마음으로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달려오신 총회장 목사님이 좋은 본보기가 되신다. 초지일관, 칠전팔기,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복음만을 전해오신 한결같은 중심의 근원은 기도의 무릎이다. 사람은 쉽게 넘어지지만, 오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만이 우리의 능력이 된다.

우리, 푯대를 향해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이 영적 통찰을 품고 사명의 길을 전심으로 달려나가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3).

양은정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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