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충성
순종과 충성
교회 신문에 글을 쓰게 된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청년부로 인도함을 받은 나에게 가장 처음 맡겨진 일은, 팀 소속원들에게 공지사항을 작성해서 전달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서 그런 것이니, 오늘부터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요약해서 주보에 올리세요.” 갑작스런 상황이었지만 곧바로 순종한 나에게 하나님은 예배 때마다 큰 은혜를 주셨고, 매주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요약해서 청년부 주보에 실을 수 있게 하셨다.
이후 수련회 후기를 시작으로 신문에 글을 올리게 된 나에게는 어떠한 특별한 이력은 없었다. 다만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에 쓰였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쓰임 받았던 작은 나귀처럼, 내게 있던 작은 달란트를 하나님의 일에 써주셨고, 순종하니 힘과 은혜를 주신 것이었다. 글을 쓰는 십수 년 동안,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생각지 못한 어려움과 고비들을 넘기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도 늘 함께하셔서 근심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눈물을 기쁨으로, 또 아픔을 치료함으로 바꾸시고, 그것을 글로 담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랑케 하셨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된다’(눅16:10)는 성경 말씀처럼, 목사님은 단 한 명의 성도로 시작해서 지금의 세계 교구를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 복종하여 수많은 영혼을 윤택하게 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과 순종의 순간들이 있었을까? 요셉이 13년 고난의 시간을 오로지 순종과 충성으로 인내해서 이집트와 온 세상을 기근에서 구원한 것처럼, 또 모세가 80의 나이에 순종하여 출애굽의 대역사에 쓰임 받은 것처럼, 성경의 인물들과 목사님을 보며 작은 순종과 충성이 모이고 모이면 내 영혼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윤택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됨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예수님을 롤모델 삼아, 목사님을 본받아 맡겨진 삶과 일에 힘써 순종하고 충성하여 나와 남을 모두 윤택하게 하는 삶을 살아보자. 영광의 그 날과 축복은 반드시 도래한다. 아멘!
이국진 사모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최근 상영 중인 영화 을 보았습니다. “교회를 짓고 찬양대를 만들어 부흥회를 열면 2억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NGO의 제안에 북한 당국이 가짜 찬양대를 만들며 벌어지는 소동과, 그 가운데 진짜 신앙을 갖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를 부르는 장면은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 찬송은 운명의 사슬을 끊어내려는 절규였으며, 30여 년 전 저희 어머니를 회심하게 했던 바로 그 곡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머니는 옆집 할머니의 전도로 올림픽공원 집회에 참석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울려 퍼지던 찬양 가사는 어머니의 마음을 깊게 움직였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부모 없이 자란 설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끊어지지 않던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어머니는 홀로 상경하여 온갖 궂은일을 다 해보았지만, 상황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에게만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처절하게 사셨던 어머니의 무거운 짐은, 그날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벗겨졌습니다. 대를 잇던 저주는 끊어졌고, 우리 가정은 주의 종들을 배출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대신 주님의 가볍고 쉬운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자도, 북한 땅의 동포도, 상처 입은 이웃과 나 자신도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만 가난과 저주, 질병과 죄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벗으려 애쓰던 무거운 짐을 이제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과 함께 걷는 그 길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와 안식이 있음을 믿습니다.
문천명 전도사
건강한 권위와 감사에 대하여
“왜 자녀를 교육부서에 보내지 않느냐?”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목회자를 우상처럼 여기게 될까 봐 걱정돼서 보내지 않는다.”
최근 한 가정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상숭배는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리고 교육부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무비판적 복종이나 맹목적 추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이해와 감사, 그리고 책임 있는 순종입니다.
얼마 전 중고등부가 필리핀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예수님, 파이팅! 목사님, 파이팅!”이라고 외쳤을 때, 목사님께서는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성경에서도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를 외친 장면이 있듯,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을 격려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어색한 일이 아닙니다.
유독 교회 안에서만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힘내세요.”라는 말에 우상숭배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줄 것을 주라… 존경을 받을 자에게 존경을 하라”(롬13:7),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딤전5:17).
존경은 질서 있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아이들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할 자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아이는 결국 세상 그 무엇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게 됩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수고에 감사할 줄 아는 아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도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책임과 섬김이 동반된 건강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성경적인 일입니다. 우상화된 권위는 경계해야 하지만, 우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는 주의 종에게 드리는 감사는 결코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부디 가정과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신앙, 존중할 줄 아는 인성을 함께 가르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럴 때 우리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은혜를 담기에 부족함 없는, 아름다운 그릇이 될 줄 믿습니다.
이현승 목사
1년에 1개
2004년 6월 30일 새벽 1시, 대학에 입학해 첫 여름방학을 맞이한 저는 원대한 목표를 세웁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어서 ①어도비 일러스트 기초 떼기, ②포토샵 공부하기, ③홈페이지 만들기를 계획했어요. 드로잉 실력이 부족하니까 ④인물 초상화도 그리려 했습니다. ⑤만화책 한 권을 골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전부 따라 그려볼 계획도 세웠죠. 이게 크로키 연습에 좋다더군요. 그러면서 도서관에 가서 ⑥광고 잡지를 읽고, ⑦일주일에 두 권씩 독서하고, ⑧일주일에 한 편씩 영화 보고, ⑨국사를 공부하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⑩영어 공부까지.
어느 때보다 의욕적이고 불타올라 있었어요. 재수해서 남들보다 뒤처진 1년을 방학 때 무조건 만회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났을 때 저는 몇 개를 해냈을까요? 부끄럽지만, 단 하나도 못했습니다. 사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저 중에서 해낸 게 없었어요. 돌이켜 보면 저는 새해 계획도 매해 저런 식으로 세웠습니다. 연초에 해내고 싶은 것을 나열하면 열다섯 개가 넘는데 연말이 되면 제대로 이룬 게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허무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됐죠. 이루지 못한 계획들은 고스란히 다음 해로, 또 다음 해로 미뤄졌고요.
이제는 1년에 딱 하나의 목표만 세웁니다. 인생에서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한 가지,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던 한 가지에만 도전하고 있어요. 그 한 가지를 해내기 위해 저의 한정된 시간, 한정된 집중력, 한정된 체력과 한정된 돈을 그러모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지 13년이 되었습니다. 2013년에는 운전면허를 땄고, 2014년에는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워 좋아하는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어요. 2015년에는 평생 콤플렉스였던 영어에 도전했습니다. 영어학원만 빠지지 말고 다니자는 마음으로 1년을 썼더니 생초보였던 실력이 어느새 준중급으로 올라가 있더라고요.
2016년에는 수영을 배웠고, 2017년에는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배웠던 영어도 쓰고 수영도 했죠. 2018년에는 다시 취업하고 방송통신대학에 편입해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2019년에는 외국인에게 가르칠 한국어를 배웠고, 2020년에는 에세이 책을 썼습니다. 2021년에는 서울 둘레길 157km를 걸었고, 2022년에는 부동산 공부를 했어요. 덕분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죠. 2023년에는 글쓰기 강의를 했고, 2024년에는 근육을 키웠고요, 2025년에는 생활 반경을 넓히기 위해 수도권 둘레길 16군데를 여행했습니다.
13년을 압축한 결과만 보면 제가 부지런해서 가능한 일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저는 곧잘 미루는 사람이에요. 고백하자면, 지금 쓰고 있는 글도 지난주 토요일에 완성하려 했는데 수요일이 되어서야 쓰고 있네요. 매일 한결같이 열심을 낼 순 없죠. 바지런히 해내는 날도 있고 무기력에 찌들어 아무것도 못 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과 나태의 반복도 멈추지 않고 1년을 이어갔더니 작년보다 나은 제가 되어 있더라고요. 1년에 겨우 하나씩만 이뤄냈을 뿐인데도 저의 삶은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작년과 다른 2026년을 만들고 싶으시다면, 많은 계획 중 딱 한 가지만 골라 1년을 써보세요. 분명, 인생 최고의 12월 31일을 경험하게 되실 거예요. 확신합니다.
신은혜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
영화 ‘심야의 기적(Miracle of the Night)’은 한밤의 고요한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작은 기적들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도 각자의 특별한 기적을 경험한다. 그 기적을 통해 인생의 불확실성,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의 소중함, 그리고 인생을 깊이 성찰하는 철학적 여정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모든 기적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반드시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던 것처럼(요2:1~5), 우리 역시 인생을 살다 보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믿음의 법칙’이 빛을 발한다.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이 더욱 찬란해지듯, 인생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가장 생생하게 나타난다.
만약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가까운 곳에서 포도주를 사 올 수 있었다면 아무도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적은 사방이 막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원과 도움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있을 때 누릴 수 있다. 불성실한 태도로 기적만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다.
기적은 어둠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 일어난다.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이 변화된다.
요한복음 2장 5절에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따르라.”고 말한다. 만약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신뢰했고, 그 믿음만큼 기적이 나타났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도, 투자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은혜·섭리를 알기에 그 앎 위에 내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기적은 바로 그 신앙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 자체보다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진정한 축복은 기적의 경험이 아니라 그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아는 것이다. 또한 ‘가나의 혼인 잔치’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다. 표적은 우리가 그 일을 행사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바라보게 한다.
확신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도한 후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기대하며 지켜본다.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고, 믿고, 선포한 것 위에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 아픔, 문제들 속에서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은 어떤 해답을 주시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야곱의 인생을 통해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변화되고 성숙해가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질 것이다.
사방이 깜깜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권정미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단체에서든, 교회에서든 싫은 사람도 있고, 때론 미운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싫어함’과 ‘미워함’은 온도의 차이일 뿐 둘 다 부정적 정서다. ‘싫어함’은 내가 멀어지고 싶은 감정이라면, ‘미워함’은 풀어내지 못한 감정이 응어리진 상태다.
성경은 ‘쓴 뿌리’를 조심하라고 말씀한다(히12:15). 처음에는 작은 서운함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감정을 끊어내거나 뽑아내지 않으면 마음 깊이 뿌리를 내려, 결국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힘들게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다(고전12장). 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손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어찌 될까? 하나님은 모든 충만함을 교회를 통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엡1장).
사람들은 오해나 섭섭함이 생기면 직분부터 내려놓고 공동체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은혜로 주신 것이다(엡4장). 그렇기에 직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람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내려놓고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우리의 영적 원수가 가장 기뻐할 일이다. 교회와 하나 되지 않는 태도는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은 아니다. ‘싫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자신을 분리하는 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에서 끊어내는 일과 같다.
감정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이 신앙의 태도와 방향을 결정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내 기분이나 감정이 우선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혹 ‘싫어함’이라는 이유 뒤에 숨어서 공동체 밖에서 서성거리는가? 이제 그 마음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한 보 앞으로 나아가보자. 한보 내딤의 용기가 자신의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더 건강하게 할 것이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대하신 것을 보고 배워라.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가룟 유다를 마주하기 힘든 불편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유다에게 떡을 떼어주시며 감정보다 더 큰 사랑으로 대하셨다. 이 사랑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양은정 생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