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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에 미혹되지 말라(히3:1~14)

1318호 · 2025-08-10

‘열두 가지 재주 가진 놈 끼니 간데없다.’

이런 말 들어보셨지요? 이 말인즉 집중할 만한 뭔가를 선택하지 않고 이것 했다 저것 했다 하면 인생의 실패자가 된다는 격언입니다.

여러분, ‘선택과 집중’, 이것이 성공의 요인입니다. 먼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목표를 정하라는 겁니다. 이루고 싶은 것, 달성하고 싶은 것을 정해야 합니다. 목표가 있어야 이룰 것 아닙니까? 과녁이 있어야 활시위를 당길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했다’(고전9:26~27)고 했습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목표가 없는 자는 향방 없이 달리는 자와 같고, 싸우는데 허공을 치는 자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권투 선수가 상대를 쳐야지 허공만 치면 어찌 됩니까? 마라톤 선수가 방향 없이 뛰면 어찌 됩니까? 잘 달린들 골인하겠습니까? 배가 목적지가 없다면, 비행기가 목적지가 없다면 어찌 됩니까? 삶의 목표가 없는 자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들을 얻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한나, 금의환향을 목표로 가진 야곱, 무너진 예루살렘 성곽을 보수하겠다고 결심한 느헤미야, 푯대를 향하여 달린 사도 바울,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일념에 온몸을 던지신 예수님, 이들 모두 성공자들입니다. 목표를 설정했기에 이뤄낸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들처럼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 초에 ‘세계교구’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성도 몇 명을 둔 지하교회에서 감히 이런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루고 말았지 않습니까? 자고로 목표는 좀 크게, 좀 높게 세워야 합니다. 남들이 ‘말도 안 돼.’ ‘헛꿈 꾸네.’ 할 정도로 목표를 크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명문대에 가리라’는 목표를 세운 수험생과 ‘아무 대학이나 가지’ 하는 수험생의 공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네 입을 넓게 열라”(시81:10)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목표를 확실히 세웠다면, 선택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입니다. 계속 물방울이 떨어지면 단단한 바위도 패이고 구멍을 낸다는 것입니다. ‘집중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햇볕에 돋보기를 대고 한 곳을 오래 비추면 검은색 종이에 불이 붙지 않습니까? 아무리 큰 아름드리나무라도 한 곳을 집중해서 도끼질하면 넘어가지 않습니까? 내가 선택한 것이 아름드리나무같이 커도, 바윗덩어리같이 단단해도 집중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집중하지 못하는 줄 압니까? 첫째는 목표 기한을 두지 않아서입니다. 선택은 했는데, 언제까지 이루겠다는 기한을 두지 않으니 차일피일 미루고, 흐지부지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루겠지’ 하면서 세월만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루겠다’는 목표 기한을 두면 집중하고, 더 매진할 수 있게 됩니다.

집중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보이는 것 다 보고, 들리는 것 다 참견하기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오셨겠습니까? 제자들도 같이 왔습니다. 그러니 할 일이 많았겠죠. 마르다는 이것 하랴, 저것 하랴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순간 마르다는 화가 치밀어서 예수님께 ‘마리아를 내보내서 나를 돕게 해달라’고 부탁드리니 예수님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초대’라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집중해야죠. 마리아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말고 자기 일에 집중해야 옳은 겁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선택하고 집중하니 예수님이 ‘그것이 옳다, 좋은 일이다’ 하신 것 아닙니까?

선택했으면 귀는 막아야 합니다. 경주마들이 양쪽 눈 옆을 가린 것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합니다. 사슴을 잡겠다고 나섰던 자가 지나가는 토끼를 보고 잡으러 뛰어다닌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토끼에 미혹되는 순간 사슴을 놓치거든요. 토끼가 지나가든 말든, 꿩이 있든 말든 오직 사슴을 쫓아야 하는 겁니다. 산삼을 캐러 갔으면 기필코 산삼을 캐야지, 도라지를 발견하고 도라지나 캐서 내려온다면 목적을 이뤘다 할 수 있습니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 일에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충실하다’는 것은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선택과 집중’으로 성공을 이룬 성경의 두 인물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하나는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목표로 삼았습니다(왕하2:9). 그리고 그 일에 집중했습니다. 엘리야는 길갈에서, 벧엘에서, 여리고에서, 요단에서 엘리사를 계속 ‘가라, 가라’ 하며 밀어냈지만, 엘리사는 절대 떠나지 않겠노라 맹세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엘리야를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얻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본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며 물을 치니 물이 이리저리 갈라졌습니다. 이는 엘리사가 목적한 바대로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또한 갑절의 능력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엘리야의 기적이 7번 기록된 것에 비해 엘리사의 기적은 갑절인 14번 기록된 것을 봐도 엘리사의 목적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좇은 사람이 엘리사 외에 50명의 선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엘리사처럼 확고한 목표가 없었기에 집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 50명의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그만두라’, ‘스승의 뜻을 따르라.’고 설득하고, 만류하고, 회유하고, 미혹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에 흔들리지 않았기에 엘리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그 나라에서 면류관과 상을 받는 것이 바울의 목표였고, 그는 선택한 것에 이렇게 집중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미혹하는 것들, 유혹하는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는 오직 목표를 좇아갔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우면 마귀도 목표를 세웁니다. 마귀의 목표는 우리가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으로, 편한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친구나 가족을 통해 유혹하고 미혹하여 목표를 잊게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선택은 잘했으니 집중해서 기필코 목표한 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목표로 삼았으면 미혹하고 유혹하는 것들, 실족게 하는 것들을 잘라내고 천국에 들어가라는 말씀이고(마5:29~30), 세상 것들에 미혹되어 목표를 상실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맞습니다. 신앙에도 집중력이 필요하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고(요4:24), ‘중언부언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고(마6:7), 주의 종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라 하신 것입니다(행6:4).

여러분, 성취는 선택과 집중의 열매입니다. 선택이 없으면 시작이 없고, 집중이 없으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원하면, 성취하고 싶거든 ‘선택, 집중’하십시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4). 할렐루야!

과녁이 있어야

화살을 쏠 수 있다

분명한 목표와

불굴의 정신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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