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기 위해
예배하기 위해​
‘예배(禮拜)’를 한자로 풀면 ‘예의를 갖춰 절하다’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Worship’과 ‘Service’가 함께 쓰이는데, ‘Worship’은 ‘가치’라는 뜻을 가진 ‘Worth’라는 단어와 ‘신분’이라는 뜻을 가진 ‘-ship’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다. 한 마디로 그 신분에 합당한 가치를 돌려드린다는 뜻이다. ‘Service’는 우리말로 치면 ‘섬김’이란 뜻으로, 섬김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을 지극 정성으로 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모든 단어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예배’를 받으시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새 학기가 되면 청년들에게 거듭 강조하며 교육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예배’의 가치이다. 학업이나 직장에서의 일정 때문에, 자기 계발이나 사회생활, 또는 인간관계 때문에 ‘예배’가 삶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가 단순히 교회에서 진행하는 어떤 프로그램의 일종이거나 사람들과의 친목 모임이 아니라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시간이요 의식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약속이나 일정을 잡을 때 우리의 우선순위는 상대방이 누구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친구와 모처럼 약속을 잡았어도 나에게 성적을 주시는 교수님이나 월급을 주시는 사장님이 그 시간에 나를 좀 보자고 한다면? 당연히 친구와의 약속을 나중으로 미루고 그 일정을 우선으로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과의 약속 시간 아닌가? 많은 청년들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을 간과하고 실수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그의 삶에는 ‘예배’가 최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구약성경의 말라기 선지자는 경고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온전한 것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음을 잊지 말라.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게 합당한 가치와 섬김을 올려드리자.
신혁주 전도사
내 뜻 말고 하나님 뜻대로
한 청년이 상담을 요청해왔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은 그대로인데 요즘 들어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모르겠단다. 나는 청년에게 ‘지금 하는 헌신도 좋지만,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의 자리에 나와 목사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이라 깨닫고, 순종함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뜻대로 섬길 줄 아는 자다. 성경에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다(삼상15:22). 사울 왕이 드린 제사는 이방신도 아니고 하나님께 드린 제사였는데도 하나님은 이 일로 사울 왕을 완전히 버리셨다. 하나님 뜻대로 드린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웃사의 일도 그렇다. 법궤를 붙잡은 것이 사람의 눈에는 충성 같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기에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최근 용서하라는 설교를 들었다. ‘나도 용서할 사람이 있는데….’ 생각하면서 무의식중에 내가 손가락을 꼬집고 있었다. 쉽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죽어가면서도 용서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니 내 마음도 점차 녹았고, 마침내 진심으로 용서하겠다는 기도에 도달했을 때, 방금까지 담이 심하게 들어 좌우로 돌아가지 않던 목이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날 오후는 내 가족이 꽤 심각한 단백뇨 증상으로 중형병원에 이어 대형병원에서 받은 정밀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용서만 했는데도 내 목이 낫자 하던 대로 귀신을 쫓았다. 당연히 신장에 전혀 이상이 없고 깨끗하다는 결과다.
용서와 순종에는 엄청난 축복이 세트로 붙어있다. 올해는 내 뜻 말고 하나님 뜻대로 순종해보자. 전대미문의 축복이 반드시 따라온다.
김혜리 교육전도사
‘이미’와 ‘아직’ 사이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물에 빠져있다. 마치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여 물에 빠져가는 것과 같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구원선이 와 물에 빠진 사람들을 찾았다. 예수님이 구원선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구원선에서 구원의 밧줄을 우리에게 던지셨다.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구원선에서 내민 밧줄을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내민 구원의 밧줄을 잡으면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 죽기 전에 잡아야 하고, 그 구원의 밧줄을 잡고 죽을 때까지 그 밧줄을 절대 놓지 말아야 한다. 이 구원의 밧줄을 그 어떤 유혹에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초림)으로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사망의 세력 마귀가 세상을 다스린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세력이 무력화되었고, 승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심판을 받고 태어난다. 우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지만 ‘아직’ 심판을 집행하지 않은 것뿐이다. 심판이 집행유예된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에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그날 집행유예는 집행유예인데 집행유예의 내용이 바뀐다. 심판의 집행유예에서 구원의 집행유예로 바뀐다. 우리는 구원의 집행유예 기간에 긴장하여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나눌 수 없다. 믿음 따로 행위 따로는 없다. 믿었으니까 행동하는 것이다. 누군가 ‘불이야!’ 할 때 불났다고 믿는다면 뛰쳐나가든, 물을 뿌리든 행함이 뒤따른다.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믿으면 방주를 준비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 믿었는데 행위가 없다면 거짓말로 믿는 척했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셨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다. 구원의 밧줄을 어떤 이유로도 절대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할렐루야!
임택함 목사
가장 좋은 하나님의 때
올해로 팔순을 맞이한 노인이 있습니다. 그는 반평생 교회를 나갔다, 안 나갔다를 반복했지요. 젊었을 때 그는 죽을병에 걸렸는데 아내와 교구 식구들의 간절한 기도로 살아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를 수술했던 의사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음에도
‘하나님이 고치셨다’라고 시인했지요. 세월이 흘러 그의 자녀들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한밤중에 자다가 정신을 잃은 그는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을 보며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때 거실에서 기도하던 아내가 이상한 느낌을 받아 안방으로 달려갔고, 사경을 헤매는 그를 깨워 귀신을 쫓아내고 자녀들을 불러 합심 기도를 했죠. 그는 또 한 번 살아났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가 어디 있느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고, 좀처럼 믿음이 자라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아내를 오랫동안 핍박하며 못살게 굴었고, 그러다가도 아내를 따라 가끔씩 주일예배에 출석하곤 했습니다.
어느덧 노인이 된 그는 1년에 몇 번 성탄절이나 전도 예배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만 가족들 등쌀에 못 이겨 교회를 나갔습니다. 2024년 10월 9일 한글날 시청에서 열린 평화통일 기도성회도 본인 의지가 아니라 아내가 가자고, 가자고 해서 억지로 따라간 거였지요. 딸들이 미리 잡아둔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 그날, 그에게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날 이후로 매주 빠지지 않고 주일예배에 출석하게 된 거지요. 스스로 원해서 말입니다. 시청 집회에서 그의 심령을 뒤흔든 건 바로 그곳에 모인 노인들이었습니다. 저렇게 많은 노인이 천국에 가려고 여기저기 먼 지방에서까지 올라와 예배드리는데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갈급함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기를 계속 기도해왔으나 워낙 완고하신지라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큰언니가 아버지에게 교회 오시는 날마다 용돈 드리겠다며 꼬시기도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웬걸, 이제는 자진해서 교회를 나오시게 된 겁니다. 지금까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불평 없이 주일예배에 나오고 계십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시청 집회에서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날 두 시간 전에 미리 가서 아버지 자리를 맡아두었는데, 갑자기 한 어르신이 와서 막무가내로 그 자리에 앉는 게 아닙니까. 맡아둔 자리니 비켜달라고 정중히 말씀드렸더니 버럭 역정을 내시더군요. 연세 많은 아버지를 오랜만에 전도해 모시는 거라며 자리를 맡아둔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높은 언성만 돌아왔습니다. 은혜받으러 왔으니 똑같이 화내지 말자고 다짐하며 겨우겨우 다른 자리를 찾아 옮겼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사실 제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를 대로 끓어오른 상태였지요. 제 마음만큼이나 주변이 무척 시끄럽고 어수선했기에 아버지도 저처럼 은혜를 받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 눈에는 막무가내인 노인들이 보였던 게 아니라 천국 가려고 예배를 드리는 노인들이 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처럼 나도 열심히 교회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생각해봅니다. 사람의 때와 달리 하나님의 때는 늦는 법이 없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는 오차가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바울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우리가 할 일은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저 멈추지 않고 심고 물을 주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족을 위해 오늘도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의 씨앗이 가장 좋은 하나님의 때에 풍성히 열매 맺히길 소망합니다.
신은혜
dopal0203@naver.com
콜레라에서 조선을 구한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1860~1956),
“식사 전 반드시 손과 입안을 깨끗하게 씻으십시오. 이를 준수하면 콜레라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며 콜레라에서 조선을 구한 선교사이다.
1887년 토론토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를 할 만큼 우수한 인재였다. 1893년 7월 감리교회 소속이었던 에비슨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교파는 상관없다’며 미국 북장로회 파송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토론토에서 의사로서 평안한 생활을 보장받은 상태였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 왔다. 그가 한국에 올 때는 부인과 3명의 자녀, 그리고 임신한 아이까지 합해 6명이 함께 왔으니 대단한 결심이었다.
1892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류하던 언더우드가 토론토대학 선교 모임을 이끌던 에비슨의 초청을 받았고, 이곳에서 한국의 선교 경험을 들려준 것이 계기가 되었고, 제중원을 담당할 의사(헤론 순교 이후 적임자 물색)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당시 캐나다에는 해외 선교사 후원 제도가 없어 미국 북장로교 후원 아래 내한했다.
그가 한국에 들어왔을 당시 제중원의 상황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사실 제중원은 존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알렌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후임이었던 헤론이 이질로 사망하면서 병원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중원의 운영을 두고 조선 정부와 6개월에 걸친 협상을 벌인 것. 결국 에비슨은 제중원을 미국 선교부로 이관했다.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이 진정한 선교병원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제중원에서 아침예배, 기도회,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1895년 한국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 그는 방역 책임자가 되어 한국인 의학도와 함께 체계적인 방역활동을 하였고, 다수의 의학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콜레라가 퇴치될 무렵, 신분차별 철폐법을 백정에게도 확대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여 내무대신 유길준으로 하여금 철폐 포고문을 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1899년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에 머물면서 선교대회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이때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로부터 재정 후원을 약속받았다. 그의 후원으로 1904년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 건립되었는데 이것이 세브란스 병원이다. 1909년 세브란스의 아들과 딸이 추가 후원하여 가 탄생하고, 1913년에는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다시 변경하면서 인턴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1917년에는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192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여러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1940년대 후반에는 연희전문학교와 합병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그는 안식년을 마친 1900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의사 양성교육을 재개하였다. 7명의 한국인 청년에게 엄격한 의료교육을 시켜서 1908년 정부로부터 최초 한국인 의사면허를 허가받았다. 이들이 최초 의사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백정 기독교인 박성춘의 장남), 신창희, 주현칙, 홍석우, 홍종은 7명이다. 간호사는 1906년 에스터 쉴즈가 설립한 세브란스 병원 내 에서 육성하였다. 1935년, 20여 년 사역한 세브란스 병원장 자리를 오긍선 교수에게 양도하여 한국인 스스로 자립적으로 병원을 운영토록 하고, 76세에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한국인을 통한 의료활동이 되어야만 자립적 의료가 가능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352명의 의사와 165명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1935년 선교사를 은퇴한 에비슨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가 기독교인친한회 총무 겸 재무를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과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했다.
에비슨은 교육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1915년 언더우드가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하는데 협력하였으며, 1916년 언더우드가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가자 그가 교장이 되어 활동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 사립 로 인가받았다.
1916년부터 1934년까지 18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고등교육에 헌신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는 1957년 1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을 합칠 때 첫 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부임하여 43년 인생 대부분을 한국 선교를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다가 1956년 8월 29일 향년 96세로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소천하게 된다. 그는 평생 모든 부와 명예를 떨쳐버리고 포용력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사업’을 강조하며 교파를 초월한 교회연합운동의 선구자로 한국을, 한국인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에비슨이 한국에서 마지막 채플 시간에 남긴 성경 구절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김종춘 목사
kkd919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