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인가, 아니면 끈인가?
끝인가, 아니면 끈인가?
작가(作家)가 마침표를 찍기까지 아무리 길어도 문장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생(生)의 마침표가 있기까지 이런저런 부호로 삶은 이어져간다. 누가 그 마침표를 찍는가? 인생의 작가이다. 류시화 시인의 책 가운데는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아주 적절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유일한 작가는 지혜도 사랑도 능력도 무한하신 창조주 우리 하나님이다.
성경에 보면 자기가 자기 인생의 종결자인 양 삶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으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 로뎀 나무 아래 엘리야다. 물론 로뎀나무 아래에서의 그의 형편은 지치고 어려운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이전 삶에는 이미 그릿 시내, 사르밧, 갈멜산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높고 깊은 위기의 장소와 시간들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로뎀나무는 작은 등성이일 뿐인데 엘리야는 거기서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탄식하며 넋두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끝이 거기가 아니라며 그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시고 멋지게 더 사용하시다가 죽음도 없이 하늘로 이끄셨다.
“내게 있는 모든 고난은 허락된 하나님의 뜻/ 거친 광야를 지날 때 더욱 낮아지게 하소서/ 환난의 바람 불 때에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나 비록 벼랑 끝에 있다 해도 희망의 끈 놓지 않게 하소서/ 내게 있는 모든 고난과 시련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허락된 고난’이라는 복음 찬양이다. 그렇다. 우리의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허락된 모든 고난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선한 계획을 가득 담고 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인간의 벼랑 끝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희망의 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떨어져 추락하라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벼랑에서 멋지게 날아오르면서 더 변화된 모습으로, 더 풍요로운 관점으로, 더 풍성한 삶을 살라고 잠시 벼랑 끝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어떤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자문해보자. 이 고난은 불행하게 닥친 우연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이다!
이 고난은 나의 벼랑 끝인가? 아니다. 새로운 일이 펼쳐질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끈이다!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목사님의 일이 곧 우리의 일
2025년 총회장 목사님의 해외집회가 코스타리카를 시작으로 다시 진행된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인간적으로는 가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왜 그렇게 멀고도 험한 길을 스스로 채찍질하며 다니실까?
모든 집회는 영적인 전쟁이다. 전쟁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전쟁은 이겨야만 살아남는 싸움이기에 목사님은 선봉에 서서 진두지휘하며 전장을 누비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뒤에서 기도로 그 전쟁이 승리하도록 보급을 해야 한다. 전투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끊임없는 무기와 식량, 보급품을 지원하는 일이다. 우리는 뒤에서 보급을 담당하는 병참부대인 것이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수아가 전장에 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치열하게 싸울 때, 모세는 손을 들고 기도한다. 모세가 피곤하여 기도가 약해지면 이스라엘이 지고, 모세의 기도가 승하면 이스라엘이 이기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잡아주고 끝까지 기도를 도왔다. 그러자 마침내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된다. 목사님이 해외에서 영적 전쟁을 치를 때마다 우리는 모세를 돕는 아론과 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집회를 성공하고 승전보를 올리며 무사 귀환하는 그날까지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
목사님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승리다. 또한 전쟁에 승리하면 획득한 전리품을 헌신한 모든 자들이 누리듯, 목사님이 받을 상을 함께 지원한 우리도 누리게 될 것이다. 목사님과 집회의 성공을 위해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다.
최성경 전도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고3 친구들과 속초로 졸업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눈 덮인 산과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맑은 동해를 보면서 다들 기뻤습니다. 이들은 앞으로 펼쳐질 일이 설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많이 부담스러울 때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수많은 선택지가 자신 앞에 놓여있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녁 예배를 준비하면서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시25:1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경외하는 것은 사랑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라는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점쟁이들이 말하듯 ‘동쪽으로 가시오’, ‘서쪽으로 가시오’, 이렇게 가르쳐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 그의 선택지에 소돔과 고모라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웠기에 그곳이 사람 보기에는 좋은 곳이었을지언정 아브라함은 먼저 배제했습니다.
다윗도 최대 정적 사울 왕을 눈앞에서 처단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에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다윗의 선택지에 없었습니다.
왜 총회장 목사님은 모든 선택에 거리낌이 없어 보일까요? 애초에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치를 떨며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만은 두려워하시기에 목사님은 여러 선택지 앞에 늘 자유함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 앞에 펼쳐진 수많은 선택지가 놓입니다. 이때 고민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꺼려지는 것부터 삭제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보이게 되고, 그것이 마침내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현승 목사
두 마리 개구리
여기 한 무리의 개구리가 숲속을 지나가고 있다. 그러다 그중 두 마리가 그만 깊은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웅덩이가 너무 깊음을 위에서 내려다본 다른 개구리들은 웅덩이에 빠진 개구리들에게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처음에는 두 마리 모두 개구리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웅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웅덩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고,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개구리들은 다들 헛수고라며 말렸다. 그러자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빠져나오기를 포기하고 더 깊은 웅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냥 죽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계속해서 뛰기를 멈추지 않았다. 뛰어오르느라 벽에 부딪혀 피를 흘리기도 했고, 더 깊은 웅덩이로 미끄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개구리들은 더 이상 다치지 말고 뛰는 것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그들 생각에는 편하게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다른 개구리들의 말을 무시한 채 더 높이, 더욱더 높이 뛰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뛰어오르던 개구리는 결국 기적처럼 웅덩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개구리들은 그 개구리를 에워싸며, 자신들이 뛰지 말라고 한 말을 들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개구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 개구리는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귀먹은 개구리는 자신에게 소리치는 다른 개구리들을 보며, 어서 웅덩이에서 빠져나와 살아남으라고 외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면서 역경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시선과 생각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결국 이야기 속 개구리들의 생사를 가른 것은 ‘생각’이었다.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여긴 개구리는 생각대로 죽음이 임했고, ‘헛수고’라며 만류하는 소리를 오히려 살아남으라는 격려로 여겼던 개구리는 ‘웅덩이’라는 역경에서 벗어났다. 이렇듯 생각의 차이가 실상은 인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아마도 살아남은 개구리에게는 앞으로 뛰어오르지 못할 깊은 웅덩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어떠한 역경과 실패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한 내적인 힘과 삶의 자양분이 되는 ‘생각’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가 개구리를 살리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겼던 조건이 오히려 살리는 조건이 되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오프라 윈프리는 세상의 불운을 다 가지고 태어났다. 흑인, 사생아, 미혼모, 성폭행 등 그녀의 불운은 차마 입에 담기에도 힘든 것들이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은 불공평이 아니라 되레 공평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개척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불운을 극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삶을 불운하게 만들었던 조건들을 오히려 역동적이고 풍성하게 만든 조건으로 바라본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라보라는 총회장 목사님처럼 말이다.
항상 ‘역경’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살아가면서 예고 없이 찾아올 많은 문제들을, 자기 자신의 내적 성장의 기회로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역경’은 우리 삶을 불운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뿐이다. 역경을 통해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인생에서 꽃피는 날이 올 것이다. 다만 그 역경을 지나는 동안 극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역경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은 늘 우리 내면에 들어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힘들었던 만큼 행복했고 즐거웠음도 깨닫는다. 우리는 편한 것은 금방 잊어버린다. 하지만 어려웠던 순간은 그만큼 아픔이 있었기에 오래도록 기억한다. 오래도록 기억될 ‘가치 있는 생각’을 갖자!
박영임 전도사
jjambballqueen@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