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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동반자는 ‘행함’입니다

1272호 · 2024-09-22
깊은 곳에서의 울림

믿음의 동반자는 ‘행함’입니다

며칠 전, ‘메인스타디움(C.S.LEE)’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1992년 6월 7일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땅끝예수전도집회’였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그날의 날씨가 화창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실상은 집회 전날부터 당일 오전까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비가 오는데도 집회를 강행할 거냐’는 전화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신 목사님은 집회 시작 전까지 사활을 걸고 기도하셨습니다. 예배를 시작하러 단에 오르시자, 하늘의 비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내리비치는 기적을 체험한 분들은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복음을 증거하시는 목사님과 인산인해를 이룬 경기장 영상을 보면서 저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을 9살의 저는 몰랐겠지요. 이날의 집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애통하고 금식 기도하며, 물심양면으로 전도하였을지를요.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한 여자 집사님께서 45인승 버스를 채우기 위해 매일 기도하고 학교 선후배들에게 전도하였더니, 기도한 대로 버스를 꽉 채워 경기장에 들어갔을 때 너무나 가슴 벅차고 감사뿐이었다는 간증을 신문으로 읽었습니다. 꼭 해내야 한다는 생각 위에 하나님이 도우셨고, 끝내 할 수 있게 해주셨다고 고백하시는 집사님의 간증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하고자 하는 자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깨닫게 하였습니다.

10월 9일 한글날, 총회장 목사님께서는 서울시청광장에서 제12차 평화통일 기도성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40일 작정기도가 시작되었고, 모두가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화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우리 교단을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처럼 평화통일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기도와 전도로,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메인스타디움 10만 명 집회 및 셀 수 없는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우리 교단의 저력을 잊지 말고, 또 한 번 기적을 만들어봅시다! 분명 이번 기도성회도 차고 넘쳐 모두가 한마음으로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기도하는 장관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을 믿습니다.

김진실 사모

소망의 언덕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묵상하다가 시편 132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다윗 왕은 하나님께 특별한 성전을 지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윗 왕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아름다운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시편 132편의 대략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그토록 기쁘셨기에 다윗의 기도에 넘치도록 응답하시고 축복하신 것일까요? 저의 넘치는 상상력으로 추측건대 다음의 본문 말씀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시132:3~5)

다윗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전까지 절대로 집에 들어가 편하게 잠을 청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목적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성막(법궤)을 찾기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계속 이스라엘 전역을 샅샅이 찾아 헤매는 젊은 다윗 왕을 상상해보십시오. 마침내 다윗은 식지 않는 사랑의 열정으로 전능자의 성막을 찾아냅니다.

총회장 목사님께서도 92년 메인스타디움집회 때 오직 하나님의 역사만 의지하며 집회가 끝나기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전도단 본부에서 지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가짐에서 이미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목사님의 그때 그 각오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12차 평화통일 집회를 위해 40일 작정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작정기도를 위한 작정기도가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각오를 다져보면 어떨까요? 그냥 시간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닌 주님을 향한 마음과 각오를 새롭게 하는 기도로 승리할 때, 우리의 오랜 기도 제목인 평화통일이 성큼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우린 이미 승리하였습니다.

이현승 목사

한국 교회사

한국 최초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는 북감리회 선교사로서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입국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17년간 한국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는 1884년 뉴저지 드류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엘라 닷지와 결혼하고 한국선교의 길로 나섰다. 그가 한국 선교사로 온 동기는 3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는 신학교 재학 시절 전국신학교 연합집회에서 한국선교의 사명을 깨달았고, 둘째는 그리피스가 쓴 이란 책을 읽고 결심했고, 셋째는 미국 잡지에 실린 이수정의 기사를 보고 한국선교의 결심을 굳혔다.

아펜젤러가 인천에 도착할 때 갑신정변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웠고 임신한 여성이 생활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했고, 아펜젤러는 포크의 조언을 받아들여 짐은 그대로 두고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하였다. 입국 후 아펜젤러 부인은 1885년 11월 9일에 딸 앨리스를 서울에서 순산했다. 이 아기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로 알려져있다.

한국 선교회 창립부터 총무로 봉사하며 서울 주재 외국인 연합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처음에 그는 교육 사역을 시작하여 배재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 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1985년 8월 3일, 정동 사택에서 이겸리와 고영필, 두 학생과 함께 학교를 시작했고, 1886년 6월 8일, 배재학당(고종이 지어준 이름,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한국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14년간 교장으로 헌신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지청천 등 독립운동가와 목회자를 육성한 것이다.

그리고 1887년 10월, 4명의 성도와 함께 정동제일교회를 시작하였고, 10년 만에 붉은 벽돌의 벧엘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지역 전도 활동을 전개하여 1891년에는 인천지역 성도들을 위해 인천 중구 내동에 내리교회와 제물포교회를 설립하였다.

1888년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한국 최초로 삼문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 중, 영 3개 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 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고, 기독교 소책자 및 그리스도 신문 발간에 참여하였으며 독립운동도 적극 지원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일에 협력하였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도중 구마가와마루호(400톤 규모의 선박)와 인천으로 가는 기소가와마루호가 충남 서천 어청도 앞바다에서 충돌하여 침몰하면서 순교했다. 사고 당시 그는 1층 1등실에 타고 있어 탈출이 가능하였으나 지하 3층에 있던 정신여고 학생과 조한규를 구하려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다른 사람 대신에 자신의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그의 나이 44세에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양화진에 비문만 세워졌다.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서천과 군산에 아펜젤러 기념관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서천 아펜젤러 기념관은 아펜젤러가 탄 배가 침몰한 어청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가 서천 지방이라서 여기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펜젤러는 여성 및 가난한 자를 사랑했다. 그의 일화로서 콜레라 유행 시절, 죽어가는 여자아이를 집에 들여 죽을 때까지 살피고 장례를 치러준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의 후손으로 아펜젤러의 아들 내외 및 딸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후 양화진 묘역 부친의 묘소 옆에 안장되어 있다. 딸 엘리스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 후 이화여대 학장으로 재직했고, 1950년 이화여대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순교하였고, 아들 헨리 D. 아펜젤러는 20년간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했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그가 처음 제물포에 도착하여 드린 기도문이 적혀 있다.

아펜젤러는 한 알의 밀알에 되어 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를 통해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어 수 없는 영혼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아펜젤레의 꿈이었다.

김종춘 목사

kkd9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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