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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길 원하면 남을 저주하지 말라(약3:2~12)

1192호 · 2023-03-12

저는 종종 목회 38년을 뒤돌아보곤 합니다. ‘내가 어떻게 그 길을 걸어왔을까?’ 싶을 정도로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 덮인 산야를 걷는 심정이었고, 오아시스도 나타나지 않는 뜨거운 사막을 걷는 심정이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핍박, 모함, 저주가 여름철 장맛비처럼 쏟아졌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으로서는 감당해내기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저도 한 성깔 하던 사람인지라 그냥 맞받아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자고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109:17~18)라는 말씀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제게 믿음의 어머니가 계셨었는데, 그분은 이런 저의 마음을 아는 듯이, “이 목사, 누군가 자네를 밟고 일어서려고 하면 그냥 밟혀주게나. 내가 밟혀서 그 사람이 산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설령 그 사람이 자네를 밟거든 비록 힘들어도 이 목사는 절대 나 살자고 다시 그 사람을 밟는 일일랑 하지 말게.”라고 권고하시곤 했습니다. 맞받아 저주하지 말라, 똑같이 짓밟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억지로 하다 보니 억울해서 눈물이 강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계속하다 보니 진심으로 그런 그들이 가엾고 불쌍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런 세월이 흐르고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저주하던 자들은 저주를 받았고, 저는 오히려 원수 목전에서 잔에 기름이 흘러넘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메랑 효과’를 아십니까? 자기가 던진 것은 결국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산울림 효과’라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산에 올라가서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르면 맞은편 산에서 ‘야호 야호 야호….’ 하고 울립니다. 하나 주고 되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다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 왕은 자신의 사위이며 충신인 다윗을 몹시 시기하여 저주하며 그가 피하는 곳마다 쫓아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와 죽음이 다윗에게 임했습니까? 오히려 자신과 세 아들에게 임했습니다. 반면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음에도 살려주고, 그의 아들을 거둔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로 인정받으며 시온의 영광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 의해 애굽 땅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형제들을 원망하며 저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요셉이 식량을 얻으러 온 형제들과 재회했을 때 한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원수 같은 놈들….” 하며 이를 부드득 간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라고 했습니다. 그런 요셉이기에 하나님이 일찍이 높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는 남을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악을 행치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남을 저주하면 너도 저주를 받고, 남을 축복하면 너도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남을 저울질하면 너도 저울질당하고, 남을 업신여기면 너도 업신여김을 받는다 이 말입니다.

나무도 좋은 것을 줘야 우리에게 그늘도, 열매도 줍니다. 그런데 나쁜 걸 줘보세요. 썩어서 벌레만 잔뜩 안겨줄 겁니다. 바다의 오염이 심각하지요? 왜 그런가요? 우리가 바다에 나쁜 것을 자꾸 주니까 그런 겁니다. 그러니 바다가 물고기를 기형으로 만들어버리고 씨를 말려버리는 겁니다. 자연도 그러할진대 사람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잠18:20). 말이란 열매를 내가 먹는다는 것입니다. 독한 말을 하면 그것을 먹어 내가 죽고, 좋은 말의 열매를 하면 그것으로 내가 복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저주하는 말일랑 일절 하지 맙시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 곧 자식이나 남편에게 ‘빌어먹을 놈’, ‘나가 죽어라’, 제발 이런 말일랑 하지 마세요.

둘째, 내가 애매히 저주를 받아도 맞받아치지 마세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기세요(롬12:21).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

스데반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회당에 있던 자들이 거짓 증인을 세워 그를 공회에 세우게 됩니다. 그가 거기서도 복음을 전파하니 무리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함께 달려들어 성 밖으로 스데반을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그때 스데반이 부르짖어 한 말이 이것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원수들을 미워하고 저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기도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눅23:34).

하나님은 우리가 이에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원수가 왼뺨을 치거든 오른뺨을 돌려대라 하십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벗었거든 입히라 하십니다(롬12:20).

“왜 그래야 하는데요?” 하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6:32~33). 맞습니다. 믿는 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지요. 더욱이 온갖 저주, 수욕을 참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주님은 우리를 다독이며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게.’(롬12:1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까만색 물감을 칠하려면 먼저 내 손에, 내 옷에 까만색이 묻습니다. 빨간색 물감을 칠하려고 하면 먼저 내게 빨간색이 묻습니다. 남에게 저주를 퍼부으려고 하면 먼저 내가 저주의 늪에 빠지게 되나 남을 축복하고 사랑하려 하면 먼저 내 마음에 축복과 사랑이 묻게 됩니다.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남을 저주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사람이 한 입으로 단물과 쓴물을 내면 되겠습니까(약3:11)?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 할렐루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언어는 예술이다

어떤 말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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