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도 바꾼다(욘3:4~10)
“은택아, 내가 KGB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 기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너랑 초현이가 그야말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기에 가능했단다.”
지난주일 4부 예배를 들어가기 전에 방송실에서 한은택 목사에게 한 말입니다.
지난 2007년 키르기스스탄에서, 하루는 2명의 KGB요원이 조용히 숙소로 찾아와 나와 슬라바 목사를 연행해갔습니다. 집회 광고지에 ‘병을 고친다’고 적힌 문구가 문제였습니다. 의료면허도 없는 자가 불법의료행위를 했다는 건데, 실상은 회교국가에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 나타나는 대형 기독교 집회가 연일 진행되니 불편했던 겁니다. 아무리 구소련시절 이야기라지만 ‘KGB’ 하면 울던 아이도 뚝 그칠 정도로 무서운 이름 아닙니까? 저와 슬라바 목사가 갇힌 곳은 사방이 회색 콘크리트요, 희미한 전등 하나만 있는 작은 방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으니 두려운 것은 없었지만, 두고 온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며 무사히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디 저와 슬라바 목사뿐이었겠습니까? 슬라바 목사와 제가 KGB 요원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끌려갔으니 남은 선교일행들은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겠습니까? 마치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심정으로 기도했을 겁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였고, 저는 재판을 받고 추방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절박하다’는 것은 너무 위급해서 지금 구해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상황을 말합니다. 마치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때 지도자인 모세는 어떠했을까요? 백성들이 모세에게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덤비며 원망까지 하니 말입니다. 모세는 정말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는지 하나님이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출14:15)라고 하시고 홍해를 갈라 그들을 건너게 하시고, 뒤따르던 애굽 군대들은 수장시키셨습니다.
절박(切迫)한 기도, 간줄기가 끊어질 정도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도 바꿉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참에 잔악무도한 니느웨 사람들이 망했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집어넣어 회개시키셨고, 물고기 배 속에서 나온 요나는 하는 수 없이 니느웨로 들어가 하룻길을 행하며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의 소리에 니느웨가 왕부터 모든 백성이 금식하며 회개하기 시작한 겁니다. 왕도 보좌에서 일어나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재에 앉아 기도했고, 심지어는 가축조차 아무것도 먹이지 않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욘3:8), 이는 간절히, 절박한 심정으로 부르짖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한나는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으셨기에 무자(無子)했습니다(삼상1:6). 그런데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사 한나에게 자녀를 주십니다. 그것도 세상에 둘도 없는 근사하고 의로운 아들, 사무엘을 주십니다. 변개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왜 마음을 바꾸셨을까요? 바로 한나의 절박한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같은 남편을 섬기는 브닌나의 조롱에 격동하여 통곡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일은 또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20:1)고 말합니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생각대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히스기야는 그 즉시 면벽하고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사38:14)라고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곧 죽는다는데요. 그랬더니 이사야가 아직 궁정을 떠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왕하20:5).
하나님은 아합의 일도 돌이키신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아합 왕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악독한 왕입니다. 그의 죄는 우상숭배와 더불어 나봇의 포도원 사건으로 극에 달했는데요. 급기야 엘리야가 아합에게 ‘너에게 재앙이 임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러자 그 악한 아합이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이 아합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시지 않고 그 아들 대에 내리신다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왕상21:29).
여러분, 악한 니느웨 사람도, 아합도 절박한 기도를 드리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겠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요? 이는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기도에 간절함이 없고, 아직 절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응답받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기도한 에스더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에도 부림절이 찾아옵니다. 또 3년 6개월 동안 닫힌 하늘 문을 열기 위해 가랑이 사이로 머리가 들어갈 만큼 간절히 기도한 엘리야처럼 기도해야 우리 삶 속에 열매가 맺히고 목마름이 해소될 것이고, 딸을 고쳐달라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간절함이 있어야 우리 삶 속에 치료의 광선이 비칠 것입니다.
여러분,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듯 기도도 끓는 시점, 곧 임계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의 임계점을 넘어야 합니다. 기도의 임계점이란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물을 아구까지 채워라’ 하신 그 지점을 말합니다. 항아리의 아구까지 물을 채워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고, 그 포도주로 인하여 잔칫집이 흥에 겹듯, 기도의 임계점이 넘어야 우리 인생에 희락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지 못함은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서도 아니고, 손이 짧아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임계점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물이 아구까지 차지 않아서입니다.
제가 해외집회에 가면 ‘오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가짜 목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건 스스로 저를 사지로 몰아넣는 선포입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겠습니까? 한은택 목사가 교회 신문에도 썼듯이 호텔 방바닥에 두 장 겹쳐 놓은 수건에 무릎 자국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정말 기도에 전무합니다. 침대에 들어가지도 않는 날이 많습니다. 가짜 목사가 아닌 하나님의 신실한 종임을 증명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겁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암이 쏟아져 나가는 기적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절박한 기도가 낳은 걸작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여러분, 성공하고 싶습니까? 매사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고 찾고 구하고 배우면 됩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습니다. 대충 하니까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면 말고.’ 이러니까 안 되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겨루는 심정으로 임해보세요. 하나님만 중심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도 우리의 마음을 읽습니다. ‘이놈은 될 때까지 할 놈이야.’라고 생각되면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저준 것처럼 만물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 망해요.”, “하나님, 의사가 못 고친대요. 살려주세요.” 그렇게 절박한 기도를 하세요. 하나님이 분명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믿음에도
커트라인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