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전가하지 마라
죄를 전가하지 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 숨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열매를 왜 먹었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13).
말인즉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고, 그 여자는 뱀 때문이라고 했다.
아담과 하와의 죄성을 물려받은 우리여서인지 몰라도 우리도 남 탓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무마하려고 한다. 사람은 속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찌 속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꿰뚫어 보시는 것처럼 우리의 죄도 꿰뚫고 있다.
사는 길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드러내고 회개해야 한다. 사울처럼 숨기면 대가를 치르게 되나 다윗처럼 죄를 고하고 회개하면 사함을 받는다. 아담이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했더라면 인간은 여전히 에덴에서 살고 있을 것이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았을 것이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감추면 의사가 치료를 할 수 없는 것처럼 타인 탓, 환경 탓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숨긴다면 죄를 용서받을 길도 없다. 죄진 일이 있다면 주께 회개하고 잘못한 상대방에게도 용서를 구하여 정결함을 회복하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김성일 집사
cre8tor@naver.com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안 낀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2년 1개월 만에 전격 해제되면서 요즘 우리 교단과 교회에 전에 없던 생기가 돌고 있다. 춘계산상집회를 시작으로 청소년 수련회와 어린이 성경캠프까지 논의가 오가는 것을 보자니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또 개인적으로는 올해 7년 만에 다시 문을 연 신학교가 주님의 은혜로 아무 탈 없이 운영되고 있어 더욱 감사할 따름이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살아계신 것처럼, 그분의 몸 된 교회도 계속 살아 움직여야 한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유대인들이 핍박하니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셨다. 야고보 사도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총회장 목사님께서 코로나 끝나면 전 세계로 다시 나가겠다, 장로 장립과 직분자 임직식을 하겠다, 시청 광장에서 기도성회를 하겠다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내며 뛸 수 있도록
‘일거리’를 주시는 것이다.
목표가 없는 삶은 부평초와 같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마음이 어려웠던 시기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듬해 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의 6개월간이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지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기였다. 괜히 동네 도서관에 앉아 시간을 보냈고, 동네를 배회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변에서 나에게 눈빛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대학부 담당 전도사와 신학원 학생처장을 겸하고 있다 보니까 기도와 설교 준비, 교육 준비, 강의 준비, 기타 여러 일처리 등으로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감사한 것은 할 일이 많으니까 내 영·혼·육이 더욱 살아나고 있는 게 스스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목사님께서 40년 가까이 그 흔한 안식년도 없이 달리고 있는 이유가 그것 아니겠는가. 계속 살아 움직이고 행동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62:7).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오늘날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그 어느 나라 젊은이들보다 자유분방하다고 한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란다. 지난 이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살 때 자유를 누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보호해 줄 나라가 생겼고, 국가의 보호 속에 자유를 마음껏 누리라는 기성세대의 관용의 결과라 생각한다.
자유는 그 자유를 보장해 줄 울타리가 있을 때 가능하다. 울타리가 없으면 진정 자유로울 것 같은데 오히려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망가지고 무너진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을 때 건강하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다. 힘이 있는 국가의 국민들은 세계 어디를 가든 자유롭다.
우리에게는 부모의 울타리가 필요하고, 사회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라는 울타리가 있어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울타리가 있다. 그 울타리는 바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국가의 통제나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서 벗어나려 한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자신을 보호해 줄 아버지 집을 떠나는 탕자가 어리석은 자다. 아버지 집을 떠나면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망가지고 말았다. 언제 회복이 가능했었나?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되었고, 사람다운 삶을 다시 살게 되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한 삶’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통제되지 않으면 부패하게 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아담 이후 범죄한 인간의 현실이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시14: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 자체가 축복이요 은혜다. “하나님이 없다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시14:1)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그 복을 누리자. 무릇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거하는 자라 확신한다.
임택함 목사
오치환 장로님을 그리며
지난주에 기도원에 계신 오치환 장로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전국 각 지역에서 만사를 제치고 찾아와 함께 해주신 성도님들 및 교역자분들과 함께한 환송예배로 인해 이별의 슬픔보다는 본향을 향한 그리움이 깊어지고 감사가 깊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환송예배에서 총회장 목사님의 송사를 읽어주실 때는 모두가 오 장로님과 이 땅에서 나눴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교단 내의 어린 종들에게 관심과 사랑이 많으셨던 장로님이셨기에 저 역시 장로님과 함께 나눈 추억이 적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 눈에 비친 장로님은 그야말로 슈퍼맨 같았습니다. 기도원 이곳저곳을 말 그대로 날아다니시면서 작업을 하셨습니다. 적어도 기도원 내에서는 장로님께 말씀드려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미숙한 봉사자들과 일하실 때도 답답해하거나 타박하지 않으시고 늘 친절함과 위트 넘치는 멘트로 상대방을 배려해주셨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나 중고등부 교사가 되어 수련회 준비를 갔을 때나 신학생이 되어 기도원 집회 봉사를 갔을 때나 전도사가 되어 기도원에 갔을 때나 언제나 그 자리에 한결같이 계셨습니다. 그런 장로님을 생각할 때면 늘 떠오르는 단어가 ‘겸손’, 그리고 ‘충성’이었습니다.
“장로님,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더욱 강건하신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기도원을 못 가서 더욱 그 소중함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장로님은 기도원의 장로님이 아니시고 교단의 장로님이십니다. 사랑합니다.”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송구한 마음을 갖고 보낸 신년 인사에, “이야…, 아아아아아~ 우리 교단의 꿈과 희망, 능력의 종에게 카톡 왔다. 야하하하하~ 기분 최고다.” 라고 너무 좋아하시면서 보내주신 답장이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어쩜 저렇게 겸손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 겸손함이 저를 돌아보게 만들고 민망하여 바로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기도원집회 마지막 날 오전 대성전 정문 쪽에 있는 야외무대에서 어린아이가 넘어져 다친 것이었습니다. 총회장 목사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펜스를 만들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때 오 장로님은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을 미루거나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집회 마지막 예배가 끝나고 모든 성도가 기도원을 떠난 뒤 뙤약볕이 내리쬐는 그곳에서 일하면서도 오 장로님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면 지시하신 일을 잘 마무리할까 골몰하며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안내 문구로 아이들에게 주의시키면 됩니다.”, “여기에 펜스를 만들면 야외무대로 쓸 때 시야가 가립니다.”, “다음 집회 때까지 작업하겠습니다.”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갑자기 생긴 작업을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일 터인데 장로님은 일절 그런 적이 없으셨습니다.
지난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장로님의 입술을 통해 한탄하거나 불평하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단둘이 작업을 하게 될 때에도 늘 예수님, 목사님께 더욱 충성하지 못함을 아쉬워하셨습니다.
그런 장로님의 겸손과 충성됨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 그리움이 큰 만큼 그 모습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장로님!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지켜봐 주세요! 승리하겠습니다. 오 장로님 같은 분이 교단 곳곳에 계십니다. 보내신 곳에서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며 주님 부르실 때까지 변치 않고 충성하시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둘째로 오직 총회장 목사님께서 삶으로 본을 보여주시고 변치 않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목사님! 부디 힘내셔요. 저희들이 있잖아요. 목사님이 힘을 내셔야 오 장로님도 안심하실 거예요.
목사님! 사랑합니다!
이현승 목사
coollee0817@naver.com
신앙의 학년
이초석 목사님의 귀신추방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심장을 쓸어내리면서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으로 달려갔던 시간도 벌써 30년이 훅~! 지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청년이 되는 긴 시간 동안 신앙생활을 했고, 학교를 다녔으면 웬만한 대학교 박사학위는 받았을 시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학년은 몇 학년인지 문득 궁금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까지 40년의 시간이 걸렸다는데 30여 년을 주님 바라기로 살아왔다고 믿는 우리는 천성에 이르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요?
매일 기도를 거의 수십 년 하고, 성경 통독도 몇 번 한 것 같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거의 외울 만큼 뇌리에 각인되어있지만, 매일을 살아가는 모습을 되돌아보면 크리스천의 향기는 고사하고 세상 사람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유구무언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품은 기독인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매일 골방에서 기도는 합니다. 며칠 전 정수기가 고장 나서 AS를 신청하고, 기사님과 시간 조율이 실패한 후 기사님께 짜증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회사 제품을 반품 요청하는 모습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어떤 향기도 품고 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생활 가운데 나의 행실이 본이 되어 믿지 않은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지.’라는 기도는 20년이 넘었지만, 오늘도 AS기사님에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따지고 이것저것 지적질하는 모습에 주님께서 눈을 감으실까 걱정입니다. 청소하는 청년의 지각에 화가 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불편하고, 급기야 어머니의 모습을 마땅찮음으로 바라보는 제 신앙의 학년은 몇 학년일까요?
천성에 이르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주님을 뵐 수 있는 천국 시민이 될 것 같은데 좁은 문 입구에서만 십수 년 서성거리는 신앙 열등생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멀리 두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는 귀동냥 설교 말씀이 영혼의 채찍이 됩니다. 교회 앞마당에서 살고 싶은 소망이 이루어지면 조금 성숙한 신앙인이 될까요? 모자라고 부족한 모습임에도 기도하면 항상 가까이서 간구의 소리를 듣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0.00001학년씩 성장해갑니다. 품어 안고 천성에 이르도록 함께하실 주님의 사랑 앞에서 오늘도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찬양으로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오자유 집사
전도
예전에 일에만 파묻혀 살 때 딸에게 여러 번 질타 받은 적이 있다. “목사님은 예배 때마다 전도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전도도 안 하고….”
딱히 가게에 드나드는 분이 배달기사님뿐이라 먹거리를 돌리며 복음을 전했고, 주변상가에는 그저 밝게 인사 잘하는 정도여서 나름 산 위의 동네 역할을 하고 있잖냐며 딸에게 반문했었다.
얼마 전 홀이 있는 가게로 이사를 왔다. TV 설치가 되지 않은 터라 일직선의 실내 내부 손님들의 시선은 자연히 주방으로 향했다. 고민 끝에 벽면의 빈 여백에 4개가량 목사님 말씀이 새겨진 액자를 걸기로 결심하자 딸이 더 많이 벽에 가득 걸자고 제안했다. 무릎을 ‘탁’ 쳤다. 창조적인 생각이라며 칭찬했다.
말씀 주문제작에 들어갔다. 문자로 보내신 목사님 말씀 중 13개를 액자로 만들어 벽에 붙이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식사 중 뚫어지라 말씀을 보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대박 대히트였다. 단골손님들이 재차 삼차 의미 깊게 읽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벤처기업의 수준 높은 시선들은 자연스레 가게주인인 내게 호감을 표했다.
어제는 한 중년 여인이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래전 체육관 집회 때 목사님께 안수받고 고침 받은 적이 있었는데 교회가 어딘지 몰라 타 교회에 안착했다 한다. ‘아! 전도만 하고 관리를 안 했구나.’ 아쉬웠다. 나도 서둘러 메뉴판 아래에 단아한 메모를 적었다. ‘유튜브 검색-예수중심교회’,
매일 매 순간 말씀을 음미하며 나 또한 터질 것 같은 성령충만을 얻는다. 오늘도 나는 벽에 걸린 액자를 소리 내어 읽는다. ‘내 뜻 못 이룬 것보다 주님 뜻 못 이룬 것을 아쉬워하라.’
추성숙 집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