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막7:25~30)
새해가 되었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집에 이사했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어야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해가 바뀌어도 매일 그 밥에 그 반찬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아리수라도 파이프라인이 녹슬었으면 녹슨 물이 나오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창고가 열려서 봇물같이 쏟아질지라도 생각이 썩은 자에게는 그것은 부당할 뿐입니다. 썩은 나무에 물을 주면 더 썩을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녹슨 파이프라인을 갈 듯, 생각을 바꿔야 기적과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자! 지금부터 나는 이런 경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내 딸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예수님이 식사하는 곳으로 찾아와 애절하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7:27)며 무시하신 겁니다. 이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당신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면 말입니다. 제가 추측건대 “안 고쳐줄 거면 그냥 가라고 하지, 개라뇨?” 하며 버럭 화를 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더럽고 치사해서….”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간의 수치를 참지 못해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목적을 상실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며 예수님께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더니 결국 그 꿈을 이뤄내고 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왜 성경에 기록되어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녀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다는 것을, 자존심을 버리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존심 따위는 버립니다. 요즘 정신없이 뛰는 대선후보들을 보십시다. 국민들이 별별 소릴 다해도 그들은 한 표를 위해서 그 앞에서 웃고, 엎드려 조아리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자존심 따위가 어디 있습니까? 오직 대통령이 되어야겠다는 목적의식만 있을 뿐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반드시 눈을 뜨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주위에서 ‘조용히 해라. 날 때부터 소경이고, 거지 주제에 왜 이리 소란이냐!’고 핀잔을 줘도 개의치 않고 예수를 목청껏 불러 소원을 이뤘고(막10:46~52),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친구에게 떡을 구하는 자도 자존심을 버리고 친구에게 강청하여 목적을 이뤘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것은 자존심을 세우려면 때론 자존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즉 자존심을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자존심을 챙길 것인가, 자존심을 버려 목적을 이룰 것인가! 당신의 생각에 따라 미래는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이름도 없는 과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빽도 없고 능력도 없는 과부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한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해결할 방법을 찾겠지만, 그녀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는지라 안하무인인 줄 알면서도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녀가 매일 그곳에 찾아가 하소연을 하지만, 그 재판관은 언제나 콧방귀만 뀔 뿐입니다. 열 번, 스무 번…. 그래도 재판관의 태도는 여전했습니다. 자! 이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할 만큼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지.’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99.9%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만둘 것입니다. 주위에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그만 포기해.’라고 말했을 거고요. 그러나 이 과부에게는 다른 것은 없어도 하나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기필코 정신’이었습니다. ‘해내고야 말겠다’,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0번, 40번…. 그러자 냉정한 재판관도 지쳤습니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아휴, 저렇게 독하고 질긴 여자는 처음이다.” 하고 손을 들었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지요. 그의 키는 평균 이하였습니다. 아주 작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갔지만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키가 작은 걸 어쩌겠어. 그냥 들어가자.’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도 과부처럼 기필코 정신으로 뽕나무에 올라가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그런 그를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온 네 친구 이야기도 해볼까요?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고치기 위해 네 명의 친구가 연합하여 예수님 곁에 가려하였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당신이 당했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친구야, 도저히 방법이 없다. 다음에 하자.’ 했을까요? 아니면 이 네 친구처럼 ‘방법을 찾아보자. 분명히 길이 있을 거야.’ 했을까요? 저는 부디 여러분이 후자를 택하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이디어가 샘솟고, 목적을 이룰 방법을 결국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필코’ 정신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가 그리 호락호락합디까?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됩디까? 근성을 필요로 할 때가 되레 많습니다. 근성, 이것이 ‘기필코’라는 정신입니다.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얻겠고, 찾아라 그러면 찾겠고,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몇 번까지 구하고, 몇 번까지 찾고, 몇 번까지 두드리라고 말씀하지 않은 것은 기필코 정신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응답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39).
야곱도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을 하다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하나님의 사자가 떠나기를 청했으나 야곱은 축복을 받기 전에는 보낼 수 없다며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습니다. 이 정신 앞에 하나님의 사자가 졌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축복하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었습니다(창32:22~32).
이런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이런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응답받을 수 없고,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혹 지금까지 기도하다가 응답이 바로 안 오면 그만 두고, 문을 조금 두드리다가 안 열리면 그만 두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매일 그 신세인 겁니다. 기필코 정신을 가지세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굽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각만 바꾸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살리려면 나뭇잎을 쳐낼 것이 아니라 썩은 뿌리를 쳐내야 하듯, 맑고 깨끗한 생수를 마시려면 녹슨 파이프라인을 교체해야 하듯 근본인 생각을 바꿀 때 인생이 살아납니다. 안 된다, 못한다 생각하면 핑계만 떠오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하고야 만다 생각하면 하나님이 방법을 떠오르게 하실 것이고, 만인과 만물을 들어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부터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세요. 그러면 미래가 달라집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니라”(잠23:7). 위대한 생각이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