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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문을 여는 비밀번호

1102호 · 2021-06-20
세상을 보는 창

하늘 문을 여는 비밀번호

이 시대의 키워드는 ‘접속’이다.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몇 번의 클릭으로 접속하면 은행의 돈을 옮길 수도 있고, 비행기, 숙소도 예약할 수 있으며, 보고 싶은 드라마 영화를 마음껏 다운로드해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접속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암호, 즉 비밀번호(Password)이다. 비밀번호를 모르거나 틀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곳으로 가는 하늘 문이 있다고 말한다. 하늘 문이 열리면 하늘의 창고가 열린다. 광야 시절 2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만나가 쏟아져 나온 하늘의 창고,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솔로몬의 지혜가 쏟아져 나온 하늘의 창고, 마귀와 귀신의 군대들을 쓸어버리는 천군 천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하늘의 창고이다.

시편 100편의 저자는 예수님이 알고 계시는 하늘 문을 여는 암호를 우리에게 그대로 공개해준다. 그는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간다고 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생의 위기 순간마다 하늘 문 앞으로 달려가서 정확한 암호, 감사를 입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잘못된 암호를 입력하면 컴퓨터나 핸드폰은 이렇게 대답한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우리가 정말 힘든 상황이 닥치면 습관적으로 불평과 원망을 터뜨리게 된다.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하다가 급기야는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한다. ‘하나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면 하늘 문에 사인이 뜰 것이다. ‘암호가 틀렸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그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일이면 통과할 수 있었던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불평과 원망의 틀린 비밀번호를 입력하니까 하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감사는 하늘 문을 여는 비밀번호다. 하늘 문이 열리면 지옥문이 닫히고, 빛의 문이 열리면 어둠의 문이 닫힌다. 하늘 문이 열리면 이때까지 나를, 우리 가정과 교회, 국가를 괴롭혔던 귀신의 세력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감사를 선포함으로써 아직 이뤄지지 않은 미래의 기적을 신속히 끌어 당겨올 수 있다.

이제부터 불평 대신 감사를 입력해 보자. 하늘 문이 열릴 것이다.

이정금 전도사

오늘의 메시지

나를 닮으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Therefore I urge you to imitate me.) 고린도전서 4장 16절 말씀이다.

예전에는 그저 사법고시만 합격하면 인성도, 경험도 무시되고 임명되었다. 그런 이유로 로스쿨이 생겨 정규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하고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법률전문대학을 이수하고 변호사 시험을 합격하여야 변호사나 검사로 임명받을 수 있다.

어느 교회들은 신학대학 나온 목사를 초빙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류대학 일반학과를 졸업하고 외국의 유명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을 원한다고 한다. 고루 갖춘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학창생활과 경험의 토대 위에 신학이 정립되길 원해서이다.

융통성과 사랑이 모자란 원리주의자, 근본주의자가 이 사회에서도, 교계에서도 넘쳐나고 있다. 바리새인이 왜 저주를 받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나도 풍파 있는 삶을 살았다. 그게 내 자산이라 믿었다. 남들이 못 살아보고 못 겪어본 삶을 산 것은 주께서 훈련하시는 것이라 믿었다. 걸어온 길이 남들과 달라도 그것이 결국은 주께서 인도하시는 축복의 과정으로 믿었다. 그래서 회사가 파산하고 홀로 신학과 전도사, 일본 선교사까지의 여정을 그저 축복의 과정이라 믿고 살았다. 그러나 내가 총회장 목사님처럼 ‘나를 닮아라!’ 할 수 없음이, 참 내 삶의 모자람이다. 자긍심과 자존심은 강하지만 ‘나를 닮아라!’ 평생 하지 못할 것 같다. 시련과 고난이 나를 정금같이 만든다고 믿고 자부하지만, 언제쯤이나 성도들을 향해

‘여러분은 나를 본받기를 바란다.’고 외칠 수 있을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You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 in spite of severe suffering, you welcomed the message with the joy given by the Holy Spirit.)

지금 나는 다만 본받고자 노력할 뿐이다. 언젠가는 본받은 자가 되었다는 주님의 인정을 받기까지.

이광주 목사

leekjlkj@naver.com

청춘, 그 아름다운 이름

돌이키고 돌이켜

예수님의 제자와 강도가 있습니다. 둘 중에 구원받을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시다시피 가룟 유다는 회계를 담당하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모든 길을 따라다니며 함께 금식하고 밤새워 기도하고 갖은 핍박과 고난을 겪었지요. 그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두렵고 슬퍼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천국에 들어가는 건 아니지요.

강도는 극악한 범죄자였습니다. 벌금이나 감옥살이 정도의 형벌이 아니라 사형이라는 최고형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렸고 그 옆에는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회개하며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에 간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애쓰고 힘쓰며 사역했던 제자가 아니라 악행을 일삼았던 강도였지요. 마지막에 강도는 돌이켜 예수님께로 나아갔고 제자는 예수님을 떠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열심으로 봉사하고 선행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온 날의 가장 마지막 순간은 언제나 오늘, 지금 이 순간이지요. 그래서 매순간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 다짐합니다. 부족한 저라서 순간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나쁜 생각도 자주 하지만, 그때그때 회개하려 노력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사과하는 일을 미루지 않으려 하고요. 첫인상보다는 끝인상이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직장에서도,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가족에게도.

마태복음에 기록된 두 아들 이야기를 종종 생각해보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아들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결국엔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거절했지만 결국엔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을까요? 예수님의 물음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둘째 아들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구원받지 못한 예수님의 제자와 구원받은 강도를 떠올리게 된 건 에스겔 33장을 읽다가였습니다. 주의 길이 바르지 않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지요. 의인이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고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고. 반대로 악인이 돌이켜 자기 죄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고. 그러니 너희는 돌이키고 돌이키라고 간구하신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사무칩니다. 부단히 애를 써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돌이키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신은혜

dopal0203@naver.com

동행하는 삶

하나님이 주신 기업

가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들이 버거울 때가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 더욱 그렇다. 코로나19로 인해 매일같이 집에 있다 보니 잔소리도 많아지고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버겁고 힘이 들기도 하다. 힘들어서 남편에게 하소연도 해보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울며 매달려본다. 내 힘으로는 안 되니 힘주시고 붙잡아주시라고, 저 아이들을 잘 키울 능력을 주시라고.

그렇게 울며 기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 저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라고. 나의 소중한 아이라고. 잠시 너에게 맡긴 것이라고. 보배롭고 소중한 저 아이를 잘 양육하라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라고. 폭풍같이 눈물이 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평소 생각하기를 ‘아이들은 하나의 인격체이니 이해하고 존중해줘야지, 아직 옳고 그름을 잘 모르니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주며 알려줘야지, 다그치지 말고 친절하게 설명해줘야지.’ 그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행동과 말투를 보니 아이한테 늘 화가 나있는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시고 속상해하시며 엄마인 나를 깨닫게 하셨다. 너무 죄송해서 회개하고 다짐했다. 그렇게 큰 깨달음을 얻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아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다. 

‘문제 아이에게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다. 아이에게 문제 행동이 나타난다면 십중팔구 부모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우며 양육태도에 따라 성장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대하는 나의 가시 돋친 말투와 태도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문제로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한동안 아이를 양육한다는 핑계로 기도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많이 괴로웠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업이다. 축복의 척도이자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업을 두고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다른 것에 시간을 쏟으면서 아이를 핑계 삼아, 방패삼아 방해가 된다 하는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하고 회개하며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아이를 잘 양육하고 키우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다만 내 기도 시간을 갖기 위해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고, 대책을 놓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배시간에 아이들이 돌아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아이들은 이 세상이 다 궁금하고, 만져보고 싶고, 가보고 싶고,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양육자가 옆에서 계속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 “지금은 예배시간이야, 돌아다니는 거 아니야,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가만히 앉아있어야 해, 저기 가보고 싶으면 예배 마치고 같이 가보자.”라고 말해주고 아이의 흥미를 끌만한 다른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한 번 말해서 모르는 것 같다고 그치면 안 된다.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알아들을 때까지 계속 알려주고 설명해줘야 한다. 아이들마다 성향이 다르고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게 잘 안되고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한 번, 두 번 허용하다 보면 나중이 더욱 힘들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

가끔 아이 발달 특성이 그렇다며 위생적이지 않고, 안전하지 않은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양육자들이 있다.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가 길바닥이 궁금하다고 바닥을 핥는데 “쟤는 원래 저래요, 감당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어요.” 한다. 원래 그러는 아이는 없다.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주신다. 간단하다. 부모가 보기에 이 상황이 안전한지, 깨끗한지만 생각해보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보배롭고 존귀한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이들은 보배롭고 존귀하다. 보배롭다는 것은 귀하고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보배롭고 존귀한 아이를 나에게 맡겨주셨으면 그에 맞게 양육해내야 한다. 더욱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따뜻하고 친절하게 키우되 안 되는 것은 단호하게 해야 한다. 사랑으로, 귀한 마음으로.

정효경 집사

신앙에세이

추억을 먹고 산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행복한 추억거리가 많은 삶이라 생각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의 여정을 걷는 동안 우리는 심적으로, 육적으로 숱한 시련을 겪는다. 그러한 시련을 겪을 때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은 그전에 좋았던 추억에서 오는 것 같다.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다시 그 행복을 동경하고 소망함으로 지금 지나가는 어려운 시절을 잘 버틸 수 있는 것 같다. 추억할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이 없다면 정말 불쌍한 인생이 아닐까.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과의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는 자가 시험을 잘 통과하고 믿음도 잘 지킬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뜨거웠던 믿음의 기억들, 젊은 날 여러 지체들과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전하고 찬양했던 순간들, 말씀이 달아 밤새도록 성경을 읽으며 울고 웃었던 시간들, 기도원에서 밤낮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울타리 안에서 느꼈던 평안과 기쁨의 계절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때의 추억이 불현듯 떠오르면 우리 삶에 희망이 주사된다.

가끔 나 자신에게, 또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많은 행복한 추억을 만들라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많은 행복한 추억을 만들라고.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고, 이 세상을 마칠 때 하늘로 가져가는 것 한 가지는 그 추억뿐이라고. 하나님과의 추억,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4)

박찬영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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