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글씨 크기 보통16
1045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이대로가 좋사옵나이다

1045호 · 2020-03-08
오늘의 메시지

돌이켜보면 내 삶도 꽤 극적이었다. 직장 후배는 나를 가리켜 풍운아 같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풍운아가 싫다. 그저 이대로가 좋다. 급진적이며 보수적이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뛰고 있는데 몸은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항간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는데 그게 가려질 일인가? 어리석다. 나부터가 사안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니 말이다. 옳고 그름이 우선 돼야지 진보와 보수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위험하다.

일본은 그야말로 보수적이다. 이곳 지바만 해도 카드 쓰는 걸 보지 못했다. 탁구장을 찾아가 보니 우리나라 5, 60년대에 썼음직한 구닥다리 탁구대를 쓰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동호회 부인들은 탁구 전용운동복에 신발, 선수 시합용 공에 비싼 탁구채를 구비해서 쓴다. 일본 주부들은 그저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 아무 공이나 떨어져있는 공을 사용한다. 전형적으로 튀지 않고 남 배려하며 소극적이다. 순종적인 것이 놀랠 노자다. 크루즈에 신종 코로나 감염자가 몇 백 명이 발생하고, 배 안에 감금해놓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이대로가 좋사옵나이다’의 전형이다.

지바교회에 온 지 두 달째이다. 벌써 이대로가 좋은 것 같다. ‘오, 주여. 이곳이 편안한 모양입니다.’ 편하길 거부해야 한다고 목사님께서 당부하신 말씀 때문에 편치 못하다. ‘오, 주님. 또 병이 도질 모양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채찍질하셨던 주님. 이제 다시 저를 또 이끌어주셔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여기가 좋아 주저앉는 저를 또 일으켜 끌어주십시오.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저를 그렇게 만드셨으니 책임져주셔야지요.’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새롭게 인도하여주셨으니 또 어떤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실까 기대합니다.

이광주 목사

신앙논객

승리를 위하여

성경은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딤후3:1~5).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악한 마귀를 능히 대적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엡6:10~17).

악한 마귀는 속이는 자요, 분리시키는 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여 인간을 죄와 고통 가운데 빠뜨린 주범이다. 그 마귀는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속이고 분쟁, 분열케 하여 가정과 교회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까지 끊어놓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하나뿐인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시고 생명 주셨음을, 또한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하늘과 땅을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희생의 사랑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려 친히 화목제물 되셔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모든 어둠과 죄악, 고통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이 된다. 이 세대는 개인의 감정에 따라 살아야 만족을 얻을 것이라 부추기지만,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야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받은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고 또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폭풍우가 이는 듯한 환경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의 목소리는 낮추고 ‘사랑하라, 용서하라, 화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할 때, 우리가 가는 좁은 길이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고, 이 세상과 모든 어둠의 세력을 강력하게 파쇄(破碎)하여 이기는 승리의 길, 생명의 길이 될 것이다.

이국진 사모

생명의 말씀

고슴도치의 딜레마

고슴도치는 몸에 가시를 갖고 있다. 물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인 셈이다. 적이 공격하면 자신의 몸을 밤송이처럼 말아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한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는 그 가시 때문에 딜레마에 빠진다.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서로 몸을 밀착시킬 수가 없다. 떨어져 있자니 춥고, 체온을 따뜻하게 하자니 상대방의 몸에 있는 가시에 찔린다. 이것을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말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한자로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해서 서로 기대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한다고 한다. 첫째는 ‘병’과 같은 사람이다. 질병처럼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을 만나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가능하면 멀리 피해야 하는 존재이다.

둘째는 ‘약’과 같은 사람이다. 약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 때나 함부로 먹지는 않는다. 평소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가 어떤 일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밥’과 같은 사람이다. 밥은 매일 매일 먹는다. 밥을 먹지 않고는 기운을 차릴 수 없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힘이 되고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주 만나면 좋다.

고든 맥도날드는 ‘같이 있어서 기쁨을 주는 사람들’과 ‘떠나는 것이 기쁨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함께 있으면 힘이 되고, 마음이 통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가시를 갖고 있어서 함께 있으면 자꾸 찔리게 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전 것은 지나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으니(고후5:17) 남은 인생은 밥과 같은 사람을 뛰어 넘어 산소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다짐해본다. 오늘도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산소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산소 같은 존재. 한 시도 없으면 안 되는 존재. 생동감을 더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리라고….

임택함 목사

청춘, 그 아름다운 이름

하기 싫은 일

“괜찮아, 무리하지마.” 요사이 제 자신에게 자주 하는 말이었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광고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한 자신이 대견하고 측은해서 더 이상은 채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퇴근하고 나면 마치 막내 손주의 투정과 어리광을 받아주는 할머니처럼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해져서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는 마음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엔 언제나 두 가지 마음이 듭니다. 곧장 눕고 싶은 마음과 설거지를 끝내고 소화시킬 겸 산책하고 싶은 마음. 대부분은 눕는 쪽이 이깁니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과 텔레비전을 켜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텔레비전을 켜는 쪽이 이기고요. 평일에는 ‘이번 주말에는 쓰고 싶은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주말이 되면 편하게 빈둥거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스스로에게 “괜찮아, 지금껏 열심히 했잖아. 지금은 이래도 돼.”라고 다독이며 말이지요. 그런데 누워있으면서도 건강해졌으면 좋겠고, 텔레비전 보면서도 영어는 잘했으면 좋겠고, 빈둥거리면서도 좋은 글이 잘 써지길 바라고 있더라고요.

최근에 영어교육 유튜브 신용하 강사의 강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나보다 성공적인 사람,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열심히 하는 사람? 능력이 뛰어난 사람? 즐겁게 하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 그의 대답을 듣고서 저는 순식간에 부끄러워졌습니다. “나보다 성공적인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은, 하기 싫은 일을 나보다 많이 한 사람이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쉽고 즐거운 시간만 보내면서 뭔가 의미 있는 결과를 바라는 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요. 성숙한 사람이라면 싫은 일,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낼 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요.

영어든 일이든 다이어트든 무언가를 잘 해내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한 비결이나 재능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집니다. 그들에겐 특별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 쉽고 빠르게 잘 해낼 수 있는 거라고요. 특별하지 않은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들처럼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고 있던 것 아닐까요? 영어학원에서 강사를 하면서 동시에 유튜브 방송을 하려고 준비하던 신용하 강사는 그 당시 하루에 두세 시간 밖에 못 잤다고 합니다. 그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쉬엄쉬엄해, 괜찮아 잘하고 있어, 무리하지 마’였다고. 아껴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 감사하지만, 변화와 성장은 언제나 우리의 한계점에서 이루어진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것도 한계점에 순간 도달했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한계점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요.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지금의 불행을 합리화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그렇다고 편한 쪽을 선택하지 말자고 그는 말합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리하는 것이 맞는다고 말이지요.

하기 싫은 일을 해냈을 때, 좀 더 발전된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강연을 본 후, 요새는 하기 싫은 일을, 귀찮은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녁을 먹고 곧장 설거지를 끝내고, 아픈 어깨를 내버려 두지 않고 틈나는 대로 스트레칭을 합니다. 억지로 영어책을 펼치고요. 이번 주말엔 누워있지 말고 글을 써야겠습니다.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은 무엇인가요?

신은혜

치우치지 않는 저울

기적을 부르는 믿음의 선포

크리스마스트리 만들 재료를 트렁크에 싣고 차 뒷좌석에 올랐습니다. 어느새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떠보니, 운전석과 조수석에는 아무도 없고 차 안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차창 밖으로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큰 사고가 난 것 같았습니다. 그 사고 차량은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였고, 지나가던 분들이 어린 저와 동생을 먼저 구조해서 다른 차로 옮겨놓은 모양입니다. 곧 119구조대원이 저를 구급차로 데려갔습니다. 아버지, 저와 동생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머리에 충격을 받았고, 팔이 부러져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습니다.

이틀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병원의 진료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부르신다(롬4:17)고 날마다 외치고 다녔는데, 병원 치료를 받아 나으면 사람들이 조롱하지 않겠느냐’며, ‘하나님께서 나를 반드시 고쳐주실 것’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날은 공휴일이어서 퇴원 처리가 되지 않아, 병상에 누워 기도했습니다. 그때부터 주변에 오디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설교 테이프를 듣는 것처럼, 어머니 귀에는 이초석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들렸습니다. 환난을 통하여 축복받은 믿음의 선친들에 대한 간증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4일째 되던 날, ‘환난 날에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의지하여 깁스를 한 상태로 퇴원했습니다. 의사와 가족이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 교단의 지교회가 없던 지역이라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출석하던 교회에서도 그건 잘못된 믿음이라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때문에 이초석 목사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반드시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몸을 간신히 이끌고, 마침 동계집회가 시작되는 장성 기도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로 기도원 기도의 동산에 올라 ‘이초석 목사님께서 단에 서시는 첫 시간에 부러진 뼈가 붙고 보이지 않는 사고의 통증까지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앞자리에 앉아 기도하며 목사님을 기다렸습니다. 이초석 목사님께서는 단에 오르자마자 바로 설교하셨는데, 놀랍게도 병상에서 어머니 귀에 들렸던 목사님의 설교와 일치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때 확신이 들었을까요?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신 후, 통성기도를 시키셨고,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깁스를 스스로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단 위로 힘차게 던졌습니다. 목사님은 어머니를 단 위로 불러 세워서, 풀어 던진 깁스를 손에 들고 많은 사람들 앞에 간증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말하고 기도한 대로, 이초석 목사님이 단에 서신 첫 시간에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 장면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하나님을 부인하던 가족들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던 그 교회 사람들이 더 이상 어머니에게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 소년 다윗은 조롱하는 골리앗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하며 나아갑니다. 그의 선포는 아군이 들었고, 적군이 들었으며, 가장 중요한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의 선포로 이 전쟁의 책임 관계는 하나님께로 이전되었으니, 다윗과 골리앗이 아니라 하나님과 골리앗의 전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선포대로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가짜 목사요!” 총회장 목사님께서는 해외집회 때마다 단에서 믿음으로 선포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 기적의 현장을 수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관자,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진심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는 말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책임지십니다. 위기를 만나거든 담대하게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정명관 성도

v-777@naver.com

신앙에세이

인정의 힘

얼마 전 회사 거래처와 식사를 할 때였다. 큰 프로젝트 마무리 후 회식 자리였는데, 그 프로젝트는 다른 때보다 훨씬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어갔다. 사실 나로서는 어느 정도 할 만큼만 해도 되었지만, 목사님께 배운 대로 이왕 ‘오리 갈 것 십리 가는 마음’으로 더욱 서비스 정신을 발휘했다.

식사 도중 거래처 담당자 중 한 명이 감사 인사를 건네며, 본인이 인사권이 있다면 날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어서 다른 담당자들도 공감의 말을 덧붙였다. 그 순간 그간의 모든 피로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 어떤 감사 인사보다 고마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인정해주는 말의 힘이 참 크다는 것을. 예수님께 인정받은 자들이 왜 죽기까지 충성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고, 기도가 응답되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그간의 모든 수고가 보상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믿는 자들의 기쁨은 기도의 응답 자체에도 있지만, 응답이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받았음을 나타내기에 더욱 기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면 우리에게 기쁨과 새 힘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온다.

반면, 마땅히 인정하지 않는 행위, 즉 무시는 화를 가져온다. 특히 가족 간에,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음을 상기하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자. 그러면 그분이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그리고 은연 중이라도 상대를 무시하지 말고 인정하는 말을 하자. 그것이 그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될 것이다.

박찬영 집사

post.naver.com/imsofriendly

1045호 다른 글

커버스토리
Text 주일설교
지혜의 말씀
Cartoon
붕우칼럼
객원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