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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사사로이 풀지 맙시다

1209호 · 2023-07-09
깊은 곳에서의 울림

꿈을 사사로이 풀지 맙시다

어느 날 저는 3일 연속 같은 꿈을 꾼 후 고민에 빠져있다가 ‘모르는 것은 물어보라’는 말씀이 떠올라 총회장 목사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꿈에 저의 죄성을 보여주시는 건지요? 저도 모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요?”,

“깨달으란 것이니 기뻐해야 한다. 관심이 없다면 상관도 안 하신다.” 목사님의 문자를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왔습니다. 주님께 합당한 자가 되기를 갈망하던 시기에 꾼 꿈인지라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인한 마음의 짓눌림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감사하게도 ‘기뻐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은 위축된 저를 일으켜 기도 자리에 앉히셨고, ‘오직 성령 충만이 너의 본성을 이길 수 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비로소 그 꿈은 죄에 대한 질책이 아닌, 나의 본성으로 구덩이에 빠질세라 기도하고 늘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친절한 메시지였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루는 친한 친구가 꿈에 나와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말했고, 우리는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보니 베개가 눈물로 젖어 있더군요. 당장 말해주고픈 굴뚝같은 마음을 내려놓고 저는 목사님께 여쭤보았습니다. “꿈에 친구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요?”, “얘기하지 마라. 자기에게 상관없는 일을 간섭하는 자는 오해를 받는다.” 상대방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야기했다가 개꿈이라고 오해받는다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친구에게 위급한 일이 생겼으니 당장 알려주라는 뜻이구나!’라고 사사로이 꿈을 풀었더라면 과연 지금까지 우정이 유지되고 있었을까요? 저는 목사님의 해몽 덕분에 그날 이후로 친구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꿈’이라는 ‘나침반’을 통해 불의의 길에 서지 않게 하시며, 어리석음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인도하십니다. 또한 장래에 일어날 좋은 일들을 꿈을 통해 계시하시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용기와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길 원한다면 기도합시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꿈과 이상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진실 사모

pupu519@naver.com

책을 펴다

모르면 물어봐라

“자네, 그것에 대해 아나?” 하고 물었을 때, “아니요, 모릅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뭡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어느 사람이 발전적이라고 보는가?

호기심은 관심이며 성공의 제1요소다.

말을 갓 배운 아이들은 질문이 참 많다. 세상사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롭고, 모르는 것투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가 귀찮을 정도로 “엄마, 이게 뭐야?” 한다.

질문을 하면 다 풀린다. 질문은 미로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왜?’라는 질문을 다섯 번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고까지 말했다.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이 바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궁금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다.

“주님, 우리는 왜 귀신을 내쫓지 못했을까요?” 주님이 말씀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제자들은 질문을 통해 답을 알아냈고, 답대로 기도했다. 그랬더니 베드로의 옷자락만 만져도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다.

모르는 것은 물어봐야 답이 나온다. 모르는 채 그대로 있으면 성장이 없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창피한 일이다. 모르는 것은 꼭 물어봐라.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찌어다”

(욥8:8).

-이초석 목사 저서 ‘뿌리가 썩은 나무에

물을 주지 말라’ 중에서

생명의 말씀

뿌리 신앙

얼마 전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께서 갑자기 소천하시게 되었다. 그동안 받고 계셨던 항암치료를 잘 극복하고 계셨기에 모두가 희망을 가졌었다. 그리고 이제 막 회복단계로 들어섰기에, 권사님의 갑작스런 소천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자녀들이 받은 충격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장례식을 인도하는 내내 유가족들의 비통한 오열로 인해 예배를 인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권사님의 삶이 주변인들에게 안타까움이요, 진한 그리움으로 남게 된 것이다. 권사님의 따듯한 언어와 잔잔한 배려심에 감동 받은 일도 많았기에 나 또한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살아생전에 늘 유언처럼 자녀와 손주들의 구원을 소망하셨고 기도하셨다. 그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한 안타까움이 유가족들에게 더하여진 것 같았다. 장례예배를 통해 강력하게 증거할 수밖에 없었던 메시지는 바로 ‘부활신앙’이었다. 권사님을 다시 만날 유일한 길은 예수 잘 믿는 거라고 전도했고, 또 결신도 했다.

사도신경에서도 늘 고백하는 바이지만, 육체는 썩어도 영혼은 썩지 않기에, 몸과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체로 덧입혀 주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리라. 사는 동안에 우리 영혼이 썩지 않도록 영혼이 먼저 잘되는 일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강단에 놓을 큰 고무나무 두 그루를 선물해주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한쪽 나뭇가지들이 시원찮아 새 나무로 교체해주셨다. 화원에서 오신 분 말씀이 ‘뿌리만 썩지 않으면 나무는 죽지 않는다’며, 시원찮은 나무를 양지바른 곳에 내놓고 대담하게 톱으로 반을 싹둑 썰어놓고 가셨다. 뿌리가 생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 죽은 듯한 나무가 다시 자라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부활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뿌리 신앙이 되어야 한다. 환경과 상황이 모두 흔들리고 어려워도 뿌리 하나만 건재하면 다시 살아난다. 겨울철에 다 죽은 나무처럼 보여도 뿌리만 살아서 유지되니 때가 되어 다시 약동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언젠간 다 썩는다. 썩지 않을 영원한 세계, 그 세계에서 영원히 살 부활의 신앙을 소망한다.

송직화 목사

GOOD NEWS

GOOD NEWS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부잣집에 태어나서 젊은 나이에 백작의 작위를 받을 정도로 부족할 것이 없는 환경이었으나 그에게는 참된 기쁨이 없었기에 세상 쾌락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집에서 일하는 농노들이 찬송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이 넘쳐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짐승처럼 일만 하는 농노들이 어떻게 저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까?’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던 중 그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참된 기쁨을 누리며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주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찾아 헤매지만 세상의 소망이나 기쁨은 손에 잡는 순간 끝이 나게 됩니다. 그토록 가지고 싶고, 취하고 싶었던 것들인데 막상 취하게 되면 기쁨보다는 허탈감과 그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가짜 소망이고, 가짜 기쁨인 것입니다.

‘한계효용감소의 법칙’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배가 고플 때 빵을 하나 먹으면 그렇게 맛이 있었는데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감소되고, 나중에는 빵이 보기도 싫어져 내팽개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안은 질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다가 죽은 뒤에 영생복락의 천국에 가시길 바랍니다.

상화평 목사

a26881009@gmail.com

주님을 향하여

바람 속의 음성

아브람은 특별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음성의 주인은 아브람에게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지시한 곳으로 가라고 하셨다. 복을 주고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창12:1~2). 아브람은 지체없이 떠났고 갈 바를 몰랐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아브람은 음성의 주인을 마음 깊이 신뢰했다. 아무런 표적도 표징도 없었지만, 그는 바람 속에서 자신을 부르던 음성의 주인이 자신과 함께하리라는 굳센 믿음이 있었다.

내게도 그런 특별한 음성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 못한 고난으로,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았던 어느 날, 그 특별한 음성을 들었다. 단 한 번도 그러한 신비를 꿈꿔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극도의 고난 앞에 절박한 내 심령이 절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문을 연 것 같다. 정말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여겨질 때, 더 이상 내디딜 곳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인 듯하다.

세상 홀로된 두려움으로 화장실 한쪽에 숨어 울고 있던 딸이 안타까우셨던 아버지는 먼저 찾아와주셨다. 모든 걸 다 알고 계시고, 모든 걸 다 내어주실 것 같은 음성이셨다. 그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뒤이어 찾아온 마음의 평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쉬웠다. 그렇게도 버겁고 무섭고 아프기만 하던 일들이 견딜만해졌다.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란 믿음도 더해졌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이렇듯 어떤 현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변화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아브람이 모든 안락함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음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만들어낸 변화였다.

신학교에 입학해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을 떠나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일은 정말 생각 이상의 진통을 가져왔다.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하고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무척 혼란스럽다는 말만으론 부족한 시간들이다. 그럼에도 이 시간을 버티고 견디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날에 나를 부르시던 아버지의 음성이 선명히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람이 음성을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것처럼 나 또한 음성만을 쫓아 오늘도 나아간다. 갈 바는 모르지만, 또 나의 앞날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나아갈 뿐이다. 지금의 내게 다른 길은 없다.

거목도 그 처음은 작은 한 그루의 묘목이었듯이, 비록 오늘의 모습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저 오늘을 이기고 조금씩 자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목사님처럼 나의 가지도 담장을 넘을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박영임 생도

빛이 되리라

어~ 기도했는데?

최근에 있었던 작은 간증을 하나 해보려고 한다. 주정차 과태료 관련한 일이다. 몇 달 전에 작은 접촉 사고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겁나는 마음에 운전 시작 전에 더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절대 사고 나지 않게 해주시고, 딱지 끊지 않게 해주시고, 차에 기스 나지 않게 해주시고, 천사야~ 이 차의 앞뒤 좌우를 꼭 지켜라~’ 등등의 기도를 꼭 하고 출발한다.

문제의 사건은 지난달 청장년부예배가 있었던 문래교육관 옆에서 일어났다. 수년간 딱지를 떼지 않는 곳이 있어서 지체들 대부분이 자유롭게 주차하던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그곳에 주차한 모든 차에 주정차 과태료 부과서가 부착되었다. 옆 건물에서 건설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곳을 통해 민원이 들어갔나 보다.

딱지를 보고 생각했다. ‘어? 이상하다? 내가 오늘 출발할 때 깜박하고 기도를 빼먹었나?’ 그런데 아니었다. 분명히 출발할 때 딱지 떼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나왔다. ‘근데 왜 이런 일이 생겼지? 앞으로 더 조심하고 주의하라는 건가?’ 생각하며 집에 가려고 하는데, 과태료 부과증을 자세히 보니, 차량 번호가 잘못 찍혀있는 게 아닌가? 내 차 번호는 27버XXXX인데, 27머XXXX로 되어 있었다. 사진 인식을 잘못했나 보다. 그리고 두 달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아무 연락이 없고 위택스에 조회해도 과태료 내역이 뜨지 않는다.

남들한테 이 얘기를 하면 백이면 백 모두 ‘진짜 과태료 차량 주인을 찾아 돌고 돌다, 언젠간 다시 날아올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내가 한 기도를 믿는다. 진심으로 기도했고, 특별히 ‘이번엔 안 돼!’라고 하실 이유도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작은 일이지만, 늘 우리의 작은 기도도 듣고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장명훈 집사

jjoshu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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