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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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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시작해라, 시작이 반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이시대 목사님께서 가장 좋아한다고 하시는 사자성어입니다.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 속에 넣어도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이야기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 능력이 저절로 드러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입니다. 그런 이시대 목사님께서 얼마 전에 ‘오늘 시작해라, 시작이 반이다.’라는 주제로 설교하셨습니다. 저는 ‘이 둘이 너무나 찰떡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쇠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는 연마가 필요하듯, 우리 삶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날카로운 송곳, 곧 실력이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되려면 그러한 갈고닦음이 필요합니다. 그 갈고닦음을 위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계획한 모든 것들이 다 뜻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계획대로 해냈든지, 그렇지 못했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나를 한 번 갈고 닦는 것이 됩니다(롬5:3~4).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저는 계속에서 조금씩 영어 공부와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신문 보는 습관을 다시 들이기 시작했고, 지금도 이미 너무나 발전한 AI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AI 실무 관련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당장 제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저를 갈고닦는 것이죠.

그러니 목사님의 말씀처럼 망설이지 말고 오늘 시작해보세요! 망설이고 있는 그 일, 도전을 시작하세요! 시작하면 결과를 맺게 될 것이고, 그것은 또 하나의 삶의 연마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낭중지추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될 것입니다(욥23:10).
윤에녹 전도사

이해 속에 넣을 수 없는 분

생명의 말씀
며칠 전 총회장 목사님의 설교 중에 강한 어조로 언급하신 내용이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방식(방법론)은 이해가 아닌 순종이다. 믿어야 순종하고, 겸손해야 순종한다. 이것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려 드는 것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며 교만이다. 그런 이들에겐 성경도 더 이상 계시가 아니고 여러 고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성경의 내용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 내 이해 속에 하나님을 가두면 이해는 잘되겠지만, 결국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으로 경도되는 것이다(고후11:4).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이성’이 순종의 영역을 넘어 타락하니 최악이 돼버렸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만 금단의 열매에 손대어 버렸다. 하나님만이 소유하시는 신비의 영역을 경박한 호기심으로 탐구하려는 폐단이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믿음이 아니니, 영원한 무한의 궤도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로 인생이 돼버렸다. 아담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다(롬5:12).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결될 일이니, 그 예수를 성경 속에서 온전히 발견하여 바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 과제다.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유명인사의 기독교 교리 설명이 화제다. 비난들이 쇄도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를 해체시켜 버렸다. 하나님을 이해시키려다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첫 관문부터 무너뜨렸다. 한 사람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수천 년 기독교 전통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기독교 역사 안에서도 있어 왔던 시도들이다. 대체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이런 시도들을 많이 해왔다. 자신의 이성(이해의 능력)을 너무나도 과신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판단능력이 절대적으로 틀림없다고 확신하니 하나님을 이해하기로 결단한 거다. 모순처럼 보이는 성경의 난제들 앞에서, 그 자체로 영감하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로 선택해야 하는데 말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시도록 만들어 드리는 것이 겸손이며 사랑이다.
송직화 목사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뜻대로

신앙논객
1930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안톤 라베이는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 드럼, 트롬본, 오보에, 피아노, 오르간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하면서 쓰임 받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랬던 그가 청년 시절, 기독교인들의 위선과 인간의 사악한 면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1966년에 급기야 ‘사탄’을 숭배하는 사탄 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그 본부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데, 거기에는 동성애자만 백만 명이 있다고 한다. 사탄 교회에는 우리가 마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처럼 복창하는 구호가 있는데, “사탄이 우리의 구원자다”가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Live your life the way you want)”, “너 자신을 경배하라(Hail Your-self)”다. 즉,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가 아닌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위험하고 깨뜨리기 어려운 우상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나 사탄 같은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이 아닐까.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어지지 않는 것은 거부한다. 다니는 교회가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자주 가는 식당을 바꾸듯 옮겨도 된다고 생각하고, 설교도 자기 생각과 일치하면 은혜롭고 좋은 설교고,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듣기 거북하면 설교자로부터 귀와 마음을 닫아버린다. 기도도, 찬송도 자기가 기분 좋으면 하고, 내키지 않거나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하나님 뜻대로’가 아닌 ‘내 뜻대로, 내 나름대로’ 섬기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성막과 성전의 양식과 구조, 그리고 그 부속물들에 대한 자세한 규격과 사용법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정하신 대로 제사(예배)하지 않으면 불이 내려와서 제사장들을 사르기도 했고, 자격을 갖추지 않은 자가 예배를 집전하거나 성물에 함부로 손을 대면 하나님의 진노가 민족 전체에 임하기도 했다. 성전의 등불도, 드리는 제물도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점검하고 올려드려야 했다. 이제는 율법 시대가 끝났고 만인 제사장 시대가 됐으니까,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니(고전3:16), 내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닌, 주인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성전 된 나의 삶을 꾸며야 하지 않을까.
신혁주 전도사

늘 깨어서 점검하자

빛이 되리라
예전에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자세로 오래 앉아서 일했고, 운동도 거의 하지 못했었고요.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가 결국 디스크 파열 진단을 받았었습니다. 한참 고생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세를 교정하거나 운동하거나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누군가는 ‘운동해야 한다. 자세 똑바로 해야 한다.’ 말해주었을 텐데 말이죠. 눈과 귀가 가려진다는 표현이 이에 해당할까요?

당시 바쁘고 멀다는 핑계로 수요예배도 잘 못 나가고, 저녁에 기도도 충분히 못했던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 삶을 온전히 인도하고 계시지 않았던 때였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다면,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고, 고쳐 나가게 하셨을 거로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프고 고통받길 원치 않으시잖아요.

이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며 살 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문제의 씨앗이 자라고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엔 모르죠. 문제는 나중에 터집니다. 그래서 깨어서 점검하며 문제의 싹을 애초에 잘라내야 합니다.

결국엔 기도밖에 없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시간 내어 기도하고, 무시로 방언으로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성령 충만을 잃으면 마귀의 밥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마귀의 밥이 된다니요. 기도가 멈추고 기도의 양이 줄 때, 우리는 이런 큰 위험에 노출됩니다. 다만 내가 지금 모르고 있을 뿐이죠. 물론 잘 안되고, 때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 다시 일어나면 되고, 다시 기도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사는지, 그렇지 못하고 있는지 늘 깨어서 점검합시다.
장명훈 집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주님을 향한 노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낳아주신 부모님은 혹 우리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릴 잊지 않으시고,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셨습니다(사49:15~16). 그분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놓지도 않으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릴 끊을 수 없습니다(롬8:39). 찬송가 가사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성경을 창세기부터 정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구약성경을 다 읽어갈 때쯤, 제게 드는 솔직한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 답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양심도 없고 의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셔서 은혜 주시고 축복 주시고 인도해주셨는데, 툭하면 불평불만에,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찾아다니기 일쑤였습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모른 체하고, 당장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럼 또 하나님은 사랑에 눈먼 바보처럼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다 응답해주셨습니다. 일방적인 짝사랑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경고하시고 기다리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나라가 멸망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제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주님께 받은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예수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한 것이 작심삼일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더러운 곳에 도로 눕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곧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사랑의 방법을 바꾸셨습니다. 바로 하나뿐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요(요3:16). 아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아버지께 드리기로 작정하셨고, 아버지는 눈물로 그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시는 확실한 증거입니다(요일4:9~10).

또한 하나님은 그 사랑을 호세아 선지자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창기 고멜을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명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함께 자식 셋을 낳고도 나가서 다른 남자와 연애를 즐깁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멜을 다시 데려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의 제물을 즐기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행음한 고멜을 다시 돈을 주고 사서라도 데려와 사랑하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우릴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호세아는 고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버지는 탕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사랑에 이제 우리도 사랑으로 보답합시다. 어서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며, 모든 것이 풍족하여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할렐루야!
이호민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