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의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에게 살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왕과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예루살렘 성도 불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염려컨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붙이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렘38:19).
왕이라면 당연히 국가와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하건만,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건만, 시드기야는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평안하고 생명을 보존할 것이라고 거듭 권면했지만, 시드기야는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불탔으며, 시드기야의 아들들은 그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하들까지 죽임을 당했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왕하25:7).
시드기야는 자존심 하나를 내려놓지 못해 왕권도, 자식도, 나라도, 두 눈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참 기가 막힌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단 살고 볼 일이다’라는 겁니다. 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잘라버리고 살고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 목숨뿐 아니라 국운이 달린 판에 무슨 자존심입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줍니까?
요즘 대한민국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아주 높습니다. K열풍이 장난이 아닙니다. 방위산업은 물론이고, 반도체, 조선업, K푸드, K뷰티, K드라마…, 대한민국 것은 뭐든 좋게 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되었겠습니까? 불과 몇십 년 전에 우리나라는 살기 위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존심을 다 버렸던 시절이 있습니다. 독일에 광부를 보내고 간호사를 보내며 차관을 들여오고 원조를 받았고요. 우리를 36년 동안 강점했던 일본에도 손을 내밀며 차관을 요청했었습니다. 자존심 많이 상하죠. 그런데도 한 국가의 자존심, 대통령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 일을 한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어 이렇게 성장 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를 향해 큰소리도 치고, 남을 도와주는 원조국이 된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자존심, 자존감은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럼요, 자존심 잠깐 내려놓아서 목적을 이룬다면 왜 그것을 못하겠습니까?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왜 위대한 여인인지 압니까? 예수님께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딸아이만 고치면 된다는 목적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헬라인 귀족입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가진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개취급을 당하면서도 자존심을 내려놓더니 예수님께 인정받고 딸을 고침 받지 않았습니까? 자존심을 버려 딸이 고침을 받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자존심 챙기고 돌아가 평생 병든 딸의 병수발 드는 게 낫습니까? 낫고 봐야죠. 살고 봐야죠.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를 보세요. 그는 유산을 앞당겨 받아 세상에서 떵떵거렸지만, 결국 다 탕진하고 굶어 죽기 직전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그래, 내가 여기서 굶어 죽느니 아버지 집에 가서 품꾼으로라도 살아야겠다. 살고 보자!’ 하고 자존심 버리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잔치까지 베풀었지요(눅15:11~24).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도 보세요. 과부는 억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줄 만한 사람은 어느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재판관이 안하무인이라. 그러니 힘 없고 돈 없고 빽 없는 과부를 돌아보기나 했겠습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과부도 자존심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자존심을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그런 재판관도 지쳐 그 원한을 풀어줬습니다. 그럼요, 소원을 이루고 봐야죠. 문둥병 걸린 나아만 장군이나 누가복음 11장에 떡을 강청한 친구도 자존심을 내던졌기에 목적을 이룬 것 아닙니까?
제가 자주 하는 비유 아시죠? 엉덩이에 종기가 난 여자 둘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진찰을 해야 하니 옷을 벗으라고 하자 남자 의사인 터라 두 여자는 갈등했습니다. 그러나한 여자는 살고보자는 심정으로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옷을 벗고 치료해서 완치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자는 망측해서 도저히 못하겠다면서 병원을 나왔고, 종기가 악성으로 발전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일까요?
성경에는 자존심 내세우다 인생 종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주자가 사울입니다. 사울이 아말렉 군대를 치고 전리품을 취해 돌아옵니다. ‘모든 소유를 가리지 말고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추궁하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변명만 늘어놓습니다(삼상15:15). 사무엘은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고, 다른 사람으로 왕을 세울 것이라는 하나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사울은 자존심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15:30). 하나님이 버렸다는데, 폐위한다는데 자존심을 챙기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비참한 말로는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 사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놓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면 얼른 ‘잘못했습니다.’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아의 처를 범한 죄를 나단 선지자가 지적하자 바로 침상이 젖도록 회개해서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랍니다. 왜 그들은 자살을 할까요? 물론 그들에게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중 하나가 땅에 밟힌 자존심 때문일 겁니다. ‘이러고 어떻게 살아?’, ‘남들을 어찌 봐?’ 생각하기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남의 말 삼 일 안하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살아야 미래가 있습니다. 살아야 기회가 있습니다. 일단 살면 떨어진 자존심을 챙길 날이 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피투성이가 돼서라도 살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존심 챙겼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도 목적 앞에서 자존심을 헌신짝 버리듯 하셨는데, 우리 자존심이 좀 밟히면 어떻습니까? 자존심 지키려다 지옥으로 떨어지면 그 인생이 너무 억울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옥을 피해 자살했는데, 영원한 지옥으로 가니 말입니다.
저는 일찍이 자존심을 기도원에 묻어버렸습니다. 목회 42년이 어찌 평탄했겠습니까? 속에서 똥물이 올라오는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교단의 목회자들이 잘못해서 교단의 이미지가 훼손될 상황에서는 그 목회자 대신 상대에게 무릎을 꿇은 일도 있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는 무조건 판사 앞에서 읍소를 했던 일도 있습니다. 살아나와야 하니까요. 그게 사내답지 못한 일입니까? 자존심이란, 스스로 자(自), 높을 존(尊), 마음 심(心)으로, 스스로의 품위를 높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려 할 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성공자들은 목적을 위해 자존심을 버린 겁니다. 채권자에게 가서 ‘살려달라’고 하세요. 모르면 아이에게도 ‘가르쳐 달라’ 하세요. 당장 없으면 ‘좀 달라’ 하세요. 살아나서 갚으면 됩니다.
자존심은 성공으로 가는 길, 목적으로 가는 길에 큰 장애물입니다. 그 말라빠진 자존심, 버려버리세요. 할렐루야!